"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리도 열국 같이 왕을 세우라”고 요구했습니다(사무엘상 8:7). 사무엘은 백성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촉구했습니다(사무엘상 12:24). 그는 공의로운 재판관으로서 그들의 죄—“그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렸다”(사무엘상 12:9-10)—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비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하리라”고 약속했고(사무엘상 12:23), 하나님께서 천둥과 비로 백성을 깨우치셨을 때(사무엘상 12:18), “두려워 말라 너희가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섬기라”고 위로했습니다(사무엘상 12:20). 사무엘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백성에게 전하며 그들을 섬김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불가분의 속성으로 함께 나타난다고 일관되게 증언하며,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구속 계획의 완전한 조화를 입증합니다. 사무엘상 12:24에서 사무엘은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하여, 공의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사무엘상 12:18, 천둥과 비로 심판 경고) 자비로 섬김의 길을 열어주심을(사무엘상 12:20, “두려워 말라”) 강조합니다. 이는 공의가 죄를 책망하고 자비가 회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이중적 행위를 보여줍니다.
공의와 자비의 동반은 구약 전반에서 드러납니다. 출애굽기 34:6-7은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여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라 죄와 과실과 악을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코 면하지 아니하리라”며, 하나님께서 자비로 용서하시되 공의로 심판하심을 선언합니다. 민수기 14:18-19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용서하나 죄 있는 자를 정결케 아니하시고”라며, 가나안 정탐 실패 후 백성을 벌하시면서도(민수기 14:23) 모세의 중보로 자비를 베프셨음을 증언합니다.
시편과 선지서도 이를 찬양합니다. 시편 85:10은 “인자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도다”라며, 공의(의)와 자비(인자)가 하나님의 구속 안에서 조화됨을 노래합니다. 이사야 16:5는 “그 보좌가 인자함으로 굳게 서고 공의로 다스리리라”고 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공의로 죄를 바로잡고 자비로 백성을 품으심을 강조합니다. 신명기 32:4-5는 “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그 모든 길이 의로우시도다 부패한 자식이 그를 악하게 행하였도다”라며, 하나님의 공의가 백성의 죄를 드러내고 자비가 그들을 다시 부르심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 24:19-20은 “여호와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라 죄를 용서치 아니하시리라”고 공의를 경고하며, “그가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큰 일”(여호수아 24:17)을 기억케 하여 자비를 상기시킵니다.
신약은 이 조화를 완성합니다. 로마서 3:25-26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셨다”며, 공의로 죄를 심판하시고 자비로 용서하시는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예를 들어 바빌로니아의 신들이 변덕으로 인간을 다룬 것(에누마 엘리시)—과 달리,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로 율법을 주시고(출애굽기 20:1-17) 자비로 구원하십니다(호세아 11:8-9). 이스라엘의 불순종(사무엘상 8:7)에도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여호수아 1:5) 하신 약속은 공의와 자비의 동반을 입증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일관된 증언, 공의와 자비의 균형, 구속사적 완성, 하나님의 신실함은 공의와 자비가 함께한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공의와 자비가 함께한다는 주장에는 심각한 반대 의견이 존재합니다.
첫째, 공의와 자비가 함께한다면 왜 하나님의 벌은 가혹했을까요? 민수기 14:33-34는 정탐꾼의 불신으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죄악을 짊어지게” 했고, 열왕기하 25:8-11은 바빌론 포로로 백성을 멸망시켰습니다. 현대의 고난(예: 2023년 자연재해, UN 재난 보고서)도 공의가 자비를 압도하는 듯 보이며, 사무엘상 12:18의 천둥과 비는 자비로운 위로(사무엘상 12:20)와 상충됩니다. 이는 공의가 자비를 무력화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둘째, 현대 철학과 윤리학은 공의와 자비의 양립을 의심하며 상호 배제적 속성으로 봅니다. 임마누엘 칸트(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1785)는 공의를 보편적 도덕법의 엄격함으로 정의하며, 자비를 감정적 약함으로 간주해 공의의 객관성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는 자비를 “약자의 도덕”이라며 공의를 훼손하는 연민으로 공격합니다. 이는 공의와 자비가 함께할 수 없고, 율법(출애굽기 34:7)의 엄중함이 자비를 억제한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은 사무엘의 이야기를 신화로 간주하며 공의와 자비를 허구로 치부합니다. 존 로프트(The Bible Unearthed, 2001)는 사무엘상 12의 사건이 역사적 증거 없이 후대에 윤색된 신학적 서사라며, “공의로 꾸짖고 자비로 위로”(사무엘상 12:9-20)가 실제가 아닌 종교적 이상화라고 주장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 2006)는 “구약의 공의는 신의 폭력적 변덕”이라며, 자비가 부차적 위안일 뿐임을 비판합니다. 이는 공의와 자비가 현실적 조화가 아니라 상상 속 이야기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넷째, 다른 종교는 공의와 자비를 다르게 해석하며 구약의 조화를 의심합니다. 이슬람은 꾸란 1:1에서 “자비롭고 공의로운 알라”를 찬양하지만, 꾸란 4:135의 공의가 엄격한 심판 중심이며, 자비(꾸란 39:53)는 회개 조건에 의존해 사무엘상 12:24의 섬김과는 맥락이 다릅니다. 힌두교(바가바드 기타, 9:29)는 카르마의 공의가 신의 자비와 무관히 작용하며, 구약의 융합을 상대화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누마 엘리시)는 신들의 변덕(마르둑의 복수)이 공의와 자비를 분리하며, 구약의 일관성을 의심케 합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세계는 공의와 자비의 조화가 실현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전쟁과 불평등(예: SIPRI 2022 보고서, 글로벌 빈곤 World Bank 2023)은 공의가 자비 없이 집행되는 듯하며, 사무엘상 12:23의 기도 같은 자비는 현실적 구제보다 관념에 가깝습니다. 만약 공의와 자비가 함께한다면, 왜 현대 사회는 여전히 공의의 엄중함만 느낄까요?(예: 사법체계의 엄격성, UN 법치 보고서 2022) 따라서 가혹한 벌, 철학적 모순, 신화적 허구, 종교적 차이, 현실적 분리는 공의와 자비가 함께한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킵니다.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상충하거나 모순된다는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첫째, “공의가 너무 엄격하면 자비가 없어 보인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은 이 둘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한다고 밝힙니다. 사무엘상 12:24에서 사무엘은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생각하고 그를 경외하며 진심으로 섬기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공의(경외함)와 자비(큰 일 행하심)가 함께 나타남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면서도 “악인의 죗값을 자손 삼사 대까지” 물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공의가 죄를 간과하지 않음을, 자비가 회복의 기회를 주심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시편 89:14도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자비와 진실이 주를 앞서 나가나이다”라며 이 둘이 조화를 이룸을 강조합니다.
둘째, “자비가 약한 자에게만 적용된다면 불공평하다”는 반론은 하나님의 자비가 편파적이지 않음을 간과합니다. 이사야 30:18은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프시려 함이요…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여, 하나님의 기다림(자비)이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며 공의와 연결됨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비유인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에서도 아버지는 방탕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만, 충실한 아들의 몫을 빼앗지 않으며 공의를 유지합니다. 이는 자비가 공의를 침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완성으로 이어짐을 입증합니다.
셋째, “현실에서 공의와 자비가 충돌한다”는 회의적 시각은 인간의 제한된 관점에서 비롯됩니다. 욥기에서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했지만(욥 9:22-23), 결국 하나님의 응답(욥 38-42장)을 통해 그의 주권과 지혜가 인간 이해를 초월함을 깨닫고 회복을 받았습니다(욥 42:10). 로마서 11:33-34도 “그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어찌 그리 깊은고…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며, 공의와 자비의 조화가 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 사건은 공의(죄의 대가 지불, 로마서 6:23)와 자비(용서와 구원, 요한복음 3:16)가 완벽히 결합된 최고의 증거입니다.
넷째, “다른 종교가 공의와 자비를 다르게 본다”는 지적은 구약의 독특한 통합성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불교의 업보는 공의에 치중하며 자비를 개인 수행에 맡기고, 이슬람의 알라는 자비로우나(꾸란 1:1) 엄격한 심판을 강조합니다(꾸란 39:53-54). 반면, 구약은 하나님의 공의가 자비로 완성됨을 일관되게 제시하며(호세아 2:19-20, “내가 인자와 정의로 너와 네게 행하리라”), 이는 신약의 예수 사역으로 이어져 더욱 명확해집니다(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지막으로, 인간 경험의 모순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증하지 않습니다. 공의가 즉각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자비가 기다림으로 작용하며(베드로후서 3:9,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사 오래 참으심”), 이는 궁극적 정의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짐을 뜻합니다(시편 73:17-18). 따라서 반증은 공의와 자비를 분리해 보거나 인간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시도일 뿐, 성경의 증언과 신학적 통찰은 이 둘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하나 됨을 강력히 입증합니다.
공의와 자비가 함께한다는 믿음은 일상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친구나 가족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공정하게 문제를 지적하되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보세요. 둘째, 불공평함을 마주할 때 목소리를 내며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따뜻한 이해를 건네는 태도를 가져보세요. 셋째, 하루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며 잘못을 인정하고,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삶 속에서 반영하며, 공동체에 희망을 전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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