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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시간과 우주의 바깥을 말할 수 있는가 - 언어적 가능성과 존재론적 불가능성의 구분에 대하여

by modeoflife 2025. 12. 18.


Ⅰ. 서론

“인간은 우주 밖에서 우주를 볼 수 있는가?”, “시간 밖에서 시간을 조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리학적·형이상학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물음이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우주란 공간과 시간의 총체이며, 시간은 모든 사건과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우주나 시간의 ‘바깥’에 서서 그것을 관찰한다는 발상은 물리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러한 불가능한 사태는 언어를 통해서는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사유될 수 있다. 우리는 “시간 밖에서 시간을 내려다본다”거나 “우주 전체를 외부에서 본다”는 문장을 이해하며, 철학적·시적·이론적 맥락 속에서 이를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다. 이 글은 이 간극에 주목하여, 왜 언어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세계에서는 불가능한지를 언어철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Ⅱ. 물리학과 존재론: 왜 ‘바깥’은 불가능한가

현대 물리학, 특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서로 독립적인 배경 조건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통합된 구조인 시공간(spacetime)을 이루며, 모든 물리적 사건은 이 시공간 내부에서만 정의되고 기술된다. 우주란 곧 이 시공간의 총체를 의미하며,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물질과 에너지뿐 아니라, 그것들이 놓여 있는 시간적·공간적 조건 자체를 포함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우주 밖”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공간적 위치나 경계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아직 도달하지 못한 먼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간 밖” 역시 시간 좌표의 연장선상에서 설정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시간은 사건들을 배열하고 인과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구조이므로, 시간의 외부를 상정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좌표계를 구성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관찰 개념을 분석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관찰이란 단순한 ‘보기’가 아니라, 상태의 변화, 정보의 획득, 그리고 인과적 연결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시간적 연속성과 변화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관찰자는 반드시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를 가지며, 관찰 행위는 필연적으로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관찰 주체가 시간의 외부에 위치한다는 가정은 관찰이라는 개념 자체를 붕괴시킨다.

이 점에서 “시간 밖에서 시간을 조망하는 관찰자”라는 표현은 단순한 경험적 불가능성을 넘어 논리적 자기모순을 내포한다.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와 과정이 없음을 의미하지만, 조망과 인식은 본질적으로 변화와 과정을 전제한다. 즉, 시간 밖에서 시간을 본다는 것은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 행위를 가정하는 동시에, 인식이라는 시간 의존적 행위를 요구하는 모순된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존재란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적 지속이나 변화의 구조를 포함한다. 시간과 무관한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세계 안의 존재라기보다는 순수한 개념적 가설이나 형이상학적 표상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우주 밖”이나 “시간 밖”은 세계에 속한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세계 개념의 한계를 시험하는 언어적 표식에 불과하다.

요컨대, 물리학적·존재론적 분석에 따르면 이 질문들은 인간의 기술적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적용 가능한 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다. 우주와 시간은 우리가 서 있거나 벗어날 수 있는 배경이 아니라, 서 있음과 벗어남이라는 개념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Ⅲ. 문제의 전환: 그럼에도 우리는 왜 말할 수 있는가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우주 밖”이나 “시간 밖”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적·존재론적 분석에 따르면 성립 조건 자체가 결여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러한 표현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대체로 이해하고, 심지어 학문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역설은 문제의 초점이 세계의 구조에서 언어의 작동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언어는 세계를 단순히 복사하거나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고유한 규칙과 조합 가능성을 지닌 자율적인 기호 체계로서,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 경험될 수 없는 것, 심지어 모순적인 것까지도 표현할 수 있다. 언어적 표현이 성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대상의 실재성이 아니라, 기호들이 일정한 문법과 의미 관계 속에서 결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사각형 원”이나 “무한히 빠른 운동”과 같은 고전적 예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표현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지만, 언어적 차원에서는 이해 가능한 형식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시간 밖의 관찰자”라는 개념 역시 물리적·논리적 문제점을 내포함에도 불구하고, 문장 안에서는 하나의 대상처럼 다루어질 수 있다. 이는 언어가 대상의 존재 조건을 직접 검증하지 않고도, 대상을 가리키는 위치를 형식적으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적 가능성이 곧 존재론적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어는 세계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 개념을 확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확장은 오류라기보다 언어의 본질적 기능에 가깝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인식 조건, 즉 시간과 공간 자체를 대상화하고, 그 조건을 넘어선 가상의 시점을 설정함으로써 세계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따라서 문제는 더 이상 “그러한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간다. 이 순간 논의의 중심은 물리학이나 우주론에서 벗어나,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생성하고, 어떤 조건에서 의미 있는 발화를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언어철학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바로 이 전환점에서, 시간과 우주의 ‘바깥’을 말하는 언어는 오류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기능하게 된다.


Ⅳ. 언어철학적 분석

1. 초기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음의 경계

초기 비트겐슈타인, 특히 『논리철학논고』에서 제시된 언어관에 따르면, 의미 있는 언어란 세계의 사실을 논리적으로 대응시키는 그림(picture)이어야 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며, 명제는 이러한 사실의 가능적 상태를 논리적 구조를 통해 ‘그려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묘사하는 세계의 상태와의 형식적 동형성에 의해 보장된다.

이 관점에서 “시간 밖에서 시간을 조망한다”는 문장은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세계 안에는 ‘시간 밖’이라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상태가 어떤 사실로 구성되는지도 규정할 수 없다. 즉, 이 문장은 세계의 가능한 사태를 논리적으로 배열하지 못하며, 그림 이론이 요구하는 대응 관계를 성립시키지 못한다. 그 결과 이 표현은 거짓인 명제가 아니라, 애초에 참·거짓을 논할 수 없는 비의미적(nonsensical) 문장으로 분류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장이 단순히 오류이거나 부정확한 설명이라는 점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시도라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 세계 전체, 그리고 그 바깥을 말하려는 시도는 언어로 세계를 기술하려는 작업의 경계를 스스로 침범하는 행위가 된다. 그는 이러한 영역을 ‘신비적인 것(das Mystische)’이라 부르며, 언어로 말해질 수는 없지만 세계에 대해 중요한 것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 맥락에서 유명한 결론 명제가 등장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명제는 단순한 언어적 금욕주의가 아니라, 의미 있는 언어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철학적 선언이다. 시간이나 우주의 ‘바깥’을 말하려는 문장은 바로 이 경계 밖에 위치하며, 세계를 설명하는 명제가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노출시키는 표지로 기능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입장은 중요한 긴장을 남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문장들을 말하고, 이해하고, 철학적으로 논의한다는 사실이다. 이 긴장은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초기 입장을 수정하고, 의미를 사실 대응이 아닌 사용과 실천의 맥락에서 재정의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2. 후기 비트겐슈타인: 의미는 사용이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의미를 세계의 사실과의 논리적 대응에서 찾았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수정한다.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언어를 더 이상 세계의 구조를 모사하는 단일한 논리 체계로 보지 않고, 인간의 다양한 활동 속에서 사용되는 다종다양한 실천의 집합으로 이해한다. 이 전환의 핵심 명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서 언어는 하나의 고정된 의미 체계를 갖지 않는다. 의미는 단어가 사용되는 구체적인 맥락, 즉 언어게임(language game) 안에서 형성되며, 각 언어게임은 고유한 규칙과 목적을 가진다. 과학적 설명, 일상적 보고, 명령, 농담, 시적 은유, 철학적 사유는 서로 다른 언어게임에 속하며, 동일한 표현이라 하더라도 사용되는 게임에 따라 그 의미와 기능은 달라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간 밖에서 시간을 조망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세계의 사실을 정확히 묘사하는 명제가 아니라, 특정한 언어게임 안에서 수행되는 철학적 행위로 이해된다. 이 문장은 물리학적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의 한계를 드러내고, 인간 인식의 조건을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이는 참·거짓을 판별해야 할 사실 명제가 아니라, 사유의 방향을 제시하고 개념적 지형을 재구성하는 표현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용이 공허한 주관적 상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게임은 개인의 임의적 발화가 아니라, 특정한 삶의 형식(form of life) 속에서 공유되는 규칙과 관습에 의해 유지된다. 철학자들이 “시간 밖”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미 철학적 담론이라는 삶의 형식 안에서 이해 가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는 “시간 밖”이라는 표현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바로 무의미함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표현은 특정한 언어게임 안에서 개념을 시험하고,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며,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기능적 의미를 지닌다. 이로써 언어는 더 이상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려다 실패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인식 조건을 성찰하도록 이끄는 실천적 장치로 이해된다.

3. 분석철학과 기술–존재의 분리

러셀을 중심으로 전개된 분석철학은 언어를 세계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기보다, 논리적으로 분석 가능한 구조로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전통에서 중요한 전제는 언어가 대상을 기술하는 방식과,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언어적 기술 가능성은 곧 존재론적 실재성을 함의하지 않는다.

러셀의 기술 이론은 이 구분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예컨대 “현재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문장은 실제로 프랑스에 왕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 문장은 하나의 고유한 대상을 전제하는 대신, 일정한 기술 조건들의 결합으로 재구성되며, 그 결과 문장의 참·거짓은 존재 여부와 분리되어 논의된다. 이 분석을 통해 러셀은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구조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간 밖의 관찰자”라는 표현 역시 이해될 수 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실재하지 않지만, 언어적으로는 일정한 기술 조건들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즉, ‘관찰자’라는 개념에 ‘시간 밖’이라는 한정 조건이 부가된 기술적 표현으로서, 문장 안에서 하나의 분석 대상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분석 가능성이 곧 해당 대상의 존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분석철학의 핵심 공헌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언어는 존재를 보증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따라서 “시간 밖의 관찰자”는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가 만들어낸 개념적 위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오류나 혼동의 산물이 아니라, 언어가 자신의 표현 범위를 확장하는 방식 중 하나다.

결국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그러한 것이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이러한 표현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언어적 질문으로 재정식화된다. 이 전환을 통해 언어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려다 실패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에 대해 다양한 수준의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분석적 장치로 자리매김한다.

4. 칸트: 초월적 개념으로서의 ‘시간 밖’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세계에 속한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선험적 감성 형식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진 인식의 틀이며, 모든 경험 가능한 대상은 이 형식 안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 이 전제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대상은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어떠한 직관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단순한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 이성이 경험의 조건을 넘어서는 개념들을 생성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는 없지만, 이성이 스스로의 구조에 따라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초월적(transzendental) 개념에 해당한다. ‘세계의 전체성’, ‘무한’, ‘자유’,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관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간 밖”이라는 개념은 칸트가 말한 이성의 초월적 사용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개념은 어떠한 경험적 직관에도 대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식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개념을 언어로 표현하고 사유할 수 있는데, 이는 이성이 경험의 경계를 넘어 무조건적인 것, 전체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칸트가 이러한 초월적 개념들을 단순한 오류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문제가 되는 것은 개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경험적 인식의 대상으로 오인하는 태도라고 보았다. “시간 밖”이라는 표현은 세계를 기술하는 인식 명제가 아니라, 인식의 조건 자체를 반성적으로 드러내는 한계 개념(Grenzbegriff)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칸트적 관점에서 언어는 “시간 밖”이라는 개념을 생성하고 유지할 수 있지만, 인식은 그 개념을 경험적으로 실현할 수 없다. 이 간극은 언어의 과잉이나 오류라기보다, 인간 이성이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구조적 조건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시간 밖”은 알 수 없는 세계를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한정해 주는 경계선으로서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Ⅴ. 언어의 역할: 세계를 넘어서 세계를 말하다

앞선 논의에서 확인했듯이, 물리학과 존재론의 관점에서는 “우주 밖”이나 “시간 밖”이라는 개념이 성립 조건을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표현들이 지속적으로 사유되고 논의될 수 있는 이유는, 언어가 세계의 구조를 단순히 반영하는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자신을 동시에 대상화하도록 만드는 메타적 사유의 매개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 내부의 사물들만을 지시하는 기호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 자체―시간, 공간, 인과성, 전체성―를 하나의 대상으로 끌어올려 사유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지만, 언어를 통해 시간의 구조를 개념화하고, 그 흐름 전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주의 내부에 존재하지만, 언어적 모델을 통해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상정하고 그 경계와 성격을 논의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세계를 넘어서는 위치를 실제로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언어는 마치 그러한 위치가 있는 것처럼 사고하도록 허용하는 가상적 시점을 구성한다. 이 시점은 물리적 좌표도, 존재론적 장소도 아니지만, 개념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 조건이다. “시간 밖에서 시간을 본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가상적 시점의 언어적 구현이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보고하기보다는 세계를 이해하는 틀 자체를 문제 삼는다.

따라서 “언어로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의 종류를 구분하라는 요구를 포함한다.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존재의 조건을 사유하게 만들 수는 있다. 언어가 허용하는 것은 세계의 초월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반성적 거리이다.

이 점에서 언어적 가능성은 결핍이나 착각이 아니라, 인간 사유의 본질적 특성이다. 우리는 결코 시간과 우주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지만, 언어를 통해 그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자체를 하나의 철학적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언어는 세계를 넘어서 세계를 말하게 하며, 인간이 자신이 속한 조건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Ⅵ. 결론

본 논의는 “우주 밖에서 우주를 본다”거나 “시간 밖에서 시간을 조망한다”는 발상이 왜 물리학적·존재론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으면서도, 언어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사유되고 논의될 수 있는지를 해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분석 결과, 이러한 표현들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기술하는 진술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기술하는 조건 자체를 문제 삼는 언어적 구성물임이 드러났다.

물리학과 존재론의 관점에서 우주와 시간은 모든 사건과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이며, 그 ‘바깥’을 상정하는 것은 개념적 적용 범위를 상실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언어는 이러한 한계를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 경험 불가능한 상태, 심지어 자기모순적 개념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추상화 능력을 지니며,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인식 조건을 반성적으로 대상화한다.

이로써 문제의 핵심은 가능과 불가능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언어의 가능성과 세계의 가능성을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요청으로 전환된다. 언어적 가능성은 존재론적 가능성을 보증하지 않지만, 그것은 오류나 착각이 아니라 인간 사유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는 표지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초월할 수는 없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에 대해 초월적인 관점에서 말할 수는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의 고유한 역할이 드러난다. 철학은 세계 바깥의 장소를 제공하지 않지만, 세계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낸다. “시간 밖”이나 “우주 밖”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실재를 지시하지 않지만,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한정하는 경계를 가시화한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적 시도는 실패한 설명이 아니라, 인간 이성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철학적 사유는 시작되고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