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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 화형대에서 종교개혁을 외치다 (1369~1415년)

by modeoflife 2025. 4. 4.


“그는 불 속에서도 진리를 외쳤다.”

1415년 7월 6일, 독일 콘스탄츠 근교의 들판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장작더미 위에 얀 후스가 쇠사슬에 묶여 서 있었다. 그의 목에는 낡은 갈색 로브가 걸려 있었고, 얼굴은 수개월간의 감옥 생활로 창백했다. 공의회 성직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이단 선고를 내렸을 때,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진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불이 붙자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그의 마지막 말은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화염에 삼켜졌지만, 그 외침은 사라지지 않았다. 보헤미아에서 시작된 그의 메시지는 후대에 종교개혁의 씨앗으로 남았다.

 

 


얀 후스는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신학자이자 설교자였다. 그는 교회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비판하며, 성경을 백성의 언어로 전하려 했다. 존 위클리프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면죄부 판매와 성직 매매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로 인해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은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처형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종교개혁의 첫걸음이 되었다.

교회, 후스가 진리를 설교한 자리

얀 후스는 1369년 보헤미아 남부의 후시네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고, 어린 시절 그는 양을 치며 자랐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갈망은 그를 프라하로 이끌었다. 1390년대 초, 그는 카를 대학교에 입학해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400년에는 사제로 서품받았고, 1401년에는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재능은 두드러졌고, 곧 대학교 학장이 되었다.  

1402년, 후스는 프라하 베들레헴 예배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이곳은 보헤미아 백성들이 모이는 중심지였다. 그는 라틴어 대신 체코어로 설교를 시작했다. “성경은 백성의 언어로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예배당은 매주 수백 명으로 북적였고, 그의 설교는 농부, 장인, 학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후스는 설교에서 교회의 부패를 숨기지 않았다. “면죄부는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모으는 수단이다”라며 교황청을 비판했다. 그는 성직자들이 사치와 탐욕에 빠진 모습을 지적했다. “그리스도는 가난했는데, 왜 교황은 금으로 장식된 궁전에 사는가?” 그의 목소리는 예배당 벽을 넘어 프라하 거리로 퍼졌다. 백성들은 그의 말에 공감했고, 학생들은 그의 가르침을 기록해 퍼뜨렸다.

백성들과의 약속, 그리고 흔들린 신뢰

후스는 백성들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는 프라하의 가난한 동네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어머니는 “면죄부를 사느라 아이들 밥을 줄였다”고 눈물지었다. 후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하나님은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진다.” 그의 설교는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그들은 그를 “우리 목소리”라 불렀다.  

그러나 교회는 후스의 인기를 경계했다. 1409년, 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그의 설교를 금지하고 프라하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는 예배와 성사를 중단시키는 조치였다. 후스는 도시를 떠나 남부 보헤미아의 시골로 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농가 헛간이나 들판에서 백성들을 모았고, 손으로 쓴 체코어 원고를 나눠주었다. “성경은 교황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것이다”라는 그의 약속은 백성들과의 깊은 유대였다.  

하지만 이 약속은 교회의 반발로 흔들렸다. 1412년, 교황 요한 23세가 후스를 파문했고, 그의 책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프라하의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후스를 따르는 백성들과 이를 반대하는 성직자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었다. 후스는 “내가 떠나면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며 고민했지만, 결국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의 신뢰는 시험에 들었고, 교회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교황청과의 대립, 그리고 최후의 선택

후스의 비판은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고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권력을 남용하고 성경을 독점한다고 비판했는데, 후스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세속의 군주에 가깝다”고 설교했다. 또한 “성직자는 백성을 섬겨야지 지배해서는 안 된다”며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  

141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이단을 단속하려는 자리였다. 후스는 심문을 받기 위해 소환되었다. 황제는 그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콘스탄츠에 도착한 그는 곧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축축한 돌바닥에 앉아 있었다. 건강은 악화되었지만, 그는 편지를 써서 지지자들을 격려했다.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라는 그의 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심문은 여러 달 이어졌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내가 거짓을 말한다면, 하나님과 백성 앞에 설 수 없다”며 타협을 거부했다. 1415년 7월 6일, 그는 이단으로 선고받았다. 화형대에 오르기 전, 성직자들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주장을 철회하면 살 수 있다.” 후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 양심은 성경에 묶여 있다.” 불이 붙었고, 그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 “오늘 나를 태우지만, 진리는 태울 수 없다.” 그의 몸은 재가 되었지만, 그의 신념은 살아남았다.

얀 후스가 남긴 것

후스의 화형대는 단순한 처형 장소가 아니었다. 교회의 부패에 맞서고, 백성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전하려 했던 그의 신념이 타오른 자리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 그의 죽음은 보헤미아 백성들을 일깨웠다. 화형 직후, 후스파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체코 지역에서 교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신앙이 백성과 함께 살아야 함을 보여주었다. 후스는 교황청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성경을 따랐다. 그의 용기는 100년 뒤 마르틴 루터에게 영감을 주었다. 루터는 후스의 기록을 읽고 말했다. “나도 후스의 길을 걸었다. 그의 진리는 내 안에 있다.” 얀 후스의 최후는 한 가지 교훈을 남겼다. 진리를 위한 헌신은 불 속에서도 꺼지지 않으며, 그 빛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 교회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