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맨발로 예루살렘을 향해 걸었다.”
1212년 여름, 프랑스와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집을 떠나 거리로 나섰다. 손에는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가 들려 있었고, 입으로는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이 어린 양치기 스테판과 쾰른의 니콜라스가 이 무리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고, 무기 대신 순수한 믿음으로 성지를 해방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여정은 곧 비극으로 끝났다.
어린이 십자군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중세의 열광적인 신앙이 낳은 슬픈 이야기다. 당시 유럽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흔들리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의 손에 있었고, 교황과 왕들은 새로운 원정을 준비했지만, 백성들은 지쳐 있었다. 그런 때에 어린아이들이 나섰다. 그들은 어른들의 무거운 갑옷 대신 가벼운 옷을 입고, 칼 대신 기도를 들고 길을 떠났다. 이 순진한 행진은 무엇을 남겼을까?
거리, 아이들의 신앙이 걸어간 길
스테판은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양을 치던 소년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낯선 이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편지는 예수께서 직접 보낸 것이며, 아이들의 순수함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으라는 명령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곧 수천 명의 아이들이 그를 따랐다. 독일의 니콜라스도 비슷한 계시를 받았다며 쾰른에서 무리를 모았다. 부모의 만류에도, 배고픔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 행진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성경 속 모세처럼 바다가 갈라질 거라 믿었다. 스테판은 마르세유로, 니콜라스는 제노바로 향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닿기만 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거라 확신했다. 길에서 만난 농부들은 빵을 나눠주었고, 성직자들은 축복을 내렸지만, 모두가 이 여정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국왕 필리프 2세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아이들의 믿음은 왕의 명령보다 강했다.
순진함과 현실의 충돌
아이들은 맨발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배고픔과 추위가 그들을 괴롭혔지만, 노래와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했다. 프랑스 무리는 마르세유에 도착했지만,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두 명의 상인이 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아이들은 기뻤지만, 그 배는 곧 폭풍에 휩쓸려 침몰하거나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독일 무리도 제노바에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바다가 열리지 않자, 많은 아이가 지쳐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이들은 이탈리아를 떠돌다 굶주림과 병으로 쓰러졌다. 니콜라스는 결국 고향으로 끌려가 처벌받았다. 이 행진은 시작부터 끝까지 비극이었다. 순수한 신앙은 그들을 구하지 못했고, 어른들의 무책임한 방관은 재앙을 키웠다.
교회와의 어긋난 꿈
아이들은 교회의 실패를 메우려 했다. 십자군 전쟁이 반복적으로 좌절되자, 사람들은 순수한 영혼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잠들 때 아이들이 깨어 있다”며 감격했지만, 정작 그들을 보호할 방도는 내놓지 않았다. 이 사건은 교회의 권위를 흔들기보다는 오히려 5차 십자군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의 꿈은 예루살렘이었다. 그들은 성지를 되찾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수함은 이용당했고,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이 행진은 신앙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드러냈다.
어린이 십자군이 남긴 것
어린이 십자군의 행진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억압과 혼란의 시대에 아이들이 신앙을 붙잡고 나선 흔적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권력이나 어른들의 무기를 믿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지 못했고, 대신 고난의 길로 이끌었다.
이 비극은 신앙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순진한 용기는 어른들을 부끄럽게 했고, 교회의 책임을 묻게 했다. 그들의 행진은 실패로 끝났지만, 하나님의 뜻을 향한 간절함은 역사에 남았다. 어린이 십자군은 한 가지 교훈을 전한다. 신앙은 맹목적인 열정만으로는 지탱되지 않으며, 실천과 지혜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가
- 1212년경 프랑스와 독일에서 실제로 어린이 십자군이 출발했으며, 역사학자들도 대체로 존재를 인정합니다.
- 프랑스의 스테판(Stephen), 독일의 니콜라스(Nicholas)가 각각 선두 인물로 전해지며 여러 연대기 자료에서 언급됩니다.
- 예루살렘 성지를 향해 무기 없이 신앙만으로 행진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 마르세유에서 선박을 제공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일부 아이들이 선박에서 사고로 죽거나, 북아프리카로 팔려간 전승은 중세 연대기에도 나옵니다.
- 독일 아이들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갔으며, 많은 수가 도중에 죽거나 귀향한 것도 사료에 있습니다.
- 아이들이 순수한 신앙으로 바다가 갈라질 것을 믿었다는 전승은 중세 종교 열광주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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