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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3: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by modeoflife 2025. 3. 26.

 

아래에서는 “명제 3: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가 참이 되도록 논리적인 논증을 제시하겠습니다. 논증 구조는 전제, 판단, 결론입니다.

 

1. 전제 (Premises)

 

이 논증의 출발점은 고통의 기원과 하나님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 관계를 분석하여,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나 책임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아래는 각 전제에 대한 분석입니다.

 

전제 A: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시고,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차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신 존재로 정의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8)라고 선언하며, 창세기 1:31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가 선하고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고통은 하나님의 본질과 모순되는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의도가 결코 고통을 창출하는 방향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프거나 다치기를 원치 않듯, 하나님도 본질적으로 인류의 고통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배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고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님을 전제합니다.

 

 

전제 B: 고통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의 결과로 발생한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창세기 1:26-27), 선택과 책임을 지닌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고 가르칩니다(예: 창세기 2:16-17, 여호수아 24:15).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써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로 인해 고통과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로마서 5:12). 또한, 인간의 선택(전쟁, 부정, 이기심)과 자연적 결과(질병, 재난)가 고통의 주요 원인임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고통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선택과 세상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안 가져간 사람이 젖는 것과 비슷합니다. 비(자연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 일부지만, 우산을 안 가져간 선택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고통도 마찬가지로 일부는 자연적, 일부는 인간의 선택에서 오는 것입니다.

 

전쟁이나 범죄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받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인간의 이기심이나 잘못된 결정에서 찾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을 “세상의 죄”로 설명합니다(요한복음 16:33).

 

전제 C: 하나님은 고통을 극복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섭리를 행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통 속에서도 인류를 구원하고 회복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고통과 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해결책입니다(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한, 욥기에서 욥이 고통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정의가 결국 드러났습니다.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는 문제임을 시사합니다.

 

병든 아이를 치료하려는 의사처럼, 하나님은 우리 고통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려 하십니다. 병(고통)은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 병을 일으킨 원인(바이러스, 사고 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고통받는 성도에게 “주님은 우리의 위로이시며, 고통 가운데도 희망을 주신다”(고린도후서 1:3-4)고 설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습니다.

 

전제 D: 신학적 전통과 철학은 고통을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 조건과 세상 상태로 해석한다.

 

신학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통을 원죄와 인간 자유의 결과로 보았고, 현대 신학자(예: C.S.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도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정론(theodicy) 논쟁에서도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신다”는 입장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라기보다는, 인간과 세상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임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이 부딪히는 것과 같습니다. 불을 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방(세상)과 사람(인간)의 상태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C.S. 루이스의 책 《고통의 문제》에서, 그는 “고통은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인간이 성장하고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는 기회”라고 설명합니다.

 

2. 판단 (Judgment)

 

위의 전제들을 종합해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를 판단해 봅시다.

 

하나님의 본질과 고통의 모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시고 사랑이시므로, 고통을 의도하거나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성경과 신학적 전통은 하나님을 고통의 원인으로 보는 것을 배제하며, 오히려 고통을 극복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고통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다른 요인(인간의 죄, 자연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 역할: 고통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에서 유래합니다. 창세기 3장과 로마서 5:12은 죄가 세상에 들어온 원인을 인간의 불순종으로 설명하며, 이는 고통의 근본적 원인임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폭력은 인간의 이기심과 잘못된 결정에서 오며, 자연 재해도 인간이 환경을 잘못 관리한 결과로 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직접적 책임이 아님을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적 응답: 하나님은 고통을 무시하거나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 속에서 구원과 회복을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위로, 그리고 성경의 약속(이사야서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은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님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고통을 극복하려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고통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는 문제로 해석됩니다.

 

신학적·철학적 합의: 신학자와 철학자는 고통을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과 양립 가능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고통을 원죄의 결과로, 루이스는 고통을 성장의 기회로 해석하며, 모두 고통이 하나님의 직접적 의도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이 합의는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조건에서 기인함을 뒷받침합니다.

 

3. 결론 (Conclusion) – 최종 판단

 

따라서,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명제는 참입니다. 이 결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도출됩니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시므로, 고통을 의도하거나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성경과 신학은 이를 분명히 가르칩니다.

 

인간의 책임: 고통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자유의지, 죄, 그리고 세상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책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은 고통을 극복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계획을 가지셨으며, 고통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는 문제입니다.

 

신학적 합의: 교회 역사와 철학적 논의는 고통을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 조건과 세상 상태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 죄, 그리고 세상 상태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이를 극복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존재로 작용하십니다. 따라서 이 명제는 기독교 신앙과 논리적으로, 실천적으로 타당합니다.

 

반증(반대 주장)

 

아래에서는 “명제 3: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에 대한 반증(refutation)을 제시하겠습니다. 이 반증은 앞서 제공된 논증이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님을 주장한 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명제가 거짓임을 입증하려 합니다. 논증 구조는 전제, 판단, 결론을 따르지만, 이번에는 명제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반증: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명제가 거짓이다

 

1. 전제 (Premises)

 

이 반증은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 그리고 인간의 자유, 세상 상태 사이의 관계를 통해 고통의 기원을 탐구하며,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아래는 각 전제에 대한 분석입니다.

 

전제 A: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은 고통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앞선 논증은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선하시고 사랑이시며, 고통을 의도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이 고통의 존재와 양립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른 척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예: 요한일서 4:8, 창세기 1:31)은 하나님을 선하신 창조주로 묘사하지만,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왜 고통을 허용하거나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은 신정론(theodicy) 논쟁의 핵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이 고통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고통은 하나님의 책임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31이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하지만, 창세기 3장 이후 고통과 죽음이 들어온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나 섭리와 직접 연결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아이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놔두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거나, 그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고통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전능하거나 선하지 않다는 의문을 낳습니다.

 

지진이나 홍수로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말만으로는 왜 이런 재난이 발생하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가 고통을 포함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전제 B: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는 고통의 모든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앞선 논증은 고통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의 결과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고통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창세기 3장과 로마서 5:12은 원죄와 인간의 불순종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자연 재해(지진, 화산 폭발)나 유전병 같은 고통은 인간의 선택이나 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기들이 태어나면서 겪는 선천적 질환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무관하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자체에 내재된 결함이나 설계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의 일부는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안 가져간 사람이 젖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지만, 갑작스러운 홍수로 집이 무너지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무관한 자연 현상입니다. 이 자연 현상은 창조주(하나님)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태풍이나 지진으로 마을 전체가 파괴되는 경우, 이는 인간의 이기심이나 잘못된 선택보다는 자연 법칙이나 창조 세계의 구조에서 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고통을 포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제 C: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는 고통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앞선 논증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극복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계획을 가지신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현재의 고통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28이나 욥기의 이야기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암시하지만, 왜 고통이 처음부터 존재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미결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원의 약속을 주지만, 이는 이미 고통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후속 조치일 뿐, 고통 자체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님을 반드시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욥기에서 욥이 고통을 겪은 이유는 하나님과 사탄의 시험으로 설명되며(욥기 1-2장),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허락 또는 계획과 연관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의사가 병든 아이를 치료한다고 해서, 아이가 병에 걸린 원인이 의사에게 없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이 있더라도 고통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나 허락에 의해 생길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나 대규모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나중에 위로를 주신다”는 말은 현재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며,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일 수 있다는 의문을 남깁니다.

 

전제 D: 신학적·철학적 전통은 고통을 하나님의 책임에서 완전히 분리하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C.S. 루이스 등은 고통을 원죄나 인간 조건의 결과로 해석했지만, 이 설명은 고통이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신정론 논쟁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주장은 모순을 피하려는 변명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왜 자유의지와 고통 사이의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으시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창조 자체에 고통을 포함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만약 신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데, 이 모순은 신학적 설명으로 해결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완벽한 건축가가 건물에 균열을 허용한다면, 그 균열은 건축가의 설계나 감독 책임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고통이 있다면, 이는 창조주(하나님)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고통을 성장의 기회로 보지만, 왜 고통이 처음부터 존재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하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2. 판단 (Judgment)

 

위의 전제들을 종합해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명제가 거짓임을 판단해 봅시다.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의 모순: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은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왜 고통을 허용하거나 없애지 않으시는 걸까요? 이 질문은 하나님의 속성과 고통이 서로 맞지 않을 수 있음을 드러내며,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창세기 1:31은 ‘모든 것이 좋았다’고 하지만, 이후 고통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나 섭리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인간 책임의 한계: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가 고통의 일부 원인을 설명할 수 있지만, 모든 고통(자연 재해, 선천적 질환)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자연적 고통은 인간의 선택과 무관하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자체에 내재된 문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의 일부는 인간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구원적 섭리의 불충분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28이나 욥기의 이야기는 고통 후의 희망을 약속하지만, 왜 고통이 처음부터 존재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욥기의 경우, 고통이 하나님과 사탄의 시험으로 허용된 점은 고통이 하나님의 직접적 책임이나 허락과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님을 부정합니다.

 

신학적·철학적 모순: 신학적 전통은 고통을 인간 조건으로 돌리려 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고통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면, 왜 그러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은 고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일부일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주장을 약화시킵니다.

 

3. 결론 (Conclusion) – 최종 판단

 

따라서,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명제는 거짓입니다. 이 결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도출됩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의 모순: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은 고통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며,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인간 책임의 한계: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는 모든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며, 자연적 고통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구원적 섭리의 불충분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고통이 하나님의 허락이나 계획과 연관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신학적·철학적 모순: 신학적 전통은 고통을 인간 조건으로 돌리려 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며, 고통은 하나님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고통은 단순히 인간의 선택이나 세상 상태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 또는 허락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주장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이 명제는 기독교 신앙과 논리적으로, 실천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반증(반대 주장)에 대한 반박

 

아래에서는 앞서 제시된 “명제 3: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에 대한 반증에 대한 반박을 제공합니다. 이 반박은 반증이 제기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원래 명제인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가 여전히 참임을 재확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논증 구조는 전제, 판단, 결론을 따르며, 반증의 약점을 지적하고 원래 명제의 타당성을 재강화합니다.

 

반박: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명제가 여전히 참이다

 

1. 전제 (Premises)

 

반증은 고통이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 인간의 자유, 그리고 창조 세계와의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고통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성을 오해하거나 과잉 해석한 것입니다. 아래는 각 전제에 대한 반박입니다.

 

전제 A: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은 고통을 설명하며, 모순이 아니라 신비를 반영한다.

 

반증은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이 고통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신학적 신비(mystery)를 간과한 것입니다. 성경(요한일서 4:8, 창세기 1:31)은 하나님을 선하시고 사랑이시며 전능하시다고 가르치는데,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 이성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와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이 고통을 허용하는 이유를 인간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이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세상 상태에서 비롯되며, 하나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원 계획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고통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이 작동하는 방식의 일부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주의 넓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이 고통을 허용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고통이 곧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지나친 판단입니다. 우주는 여전히 넓고 신비롭지만, 그 존재는 틀림없습니다.

 

지진이나 홍수가 발생해도,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 46:1)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습니다.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극복하시려는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전제 B: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는 고통의 주요 원인을 설명하며, 자연적 고통도 간접적으로 인간 책임과 연관된다.

 

성경은 원죄가 세상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가르치며(창세기 3, 로마서 5:12), 자연 재해와 질병도 원죄와 타락한 창조 세계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반증은 지진, 화산 폭발, 유전병 같은 자연적 고통이 인간의 선택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원죄가 창조 질서에 미친 영향을 간과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세상을 타락시켰고, 로마서 5:12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라고 밝힙니다. 이로 인해 자연 재해와 질병은 타락한 세계의 일부로 나타나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에서 비롯된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환경 파괴와 이기심은 기후 변화와 생태계 불균형을 초래하며, 이는 자연적 고통과 간접적으로 연결됩니다. C.S. 루이스(C.S. Lewis)는 자연법칙이 고통을 초래할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타락한 상태에서 작동하는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자연적 고통도 원죄와 인간 책임의 영향을 반영하며, 하나님의 직접적 책임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정원이 가꾸지 않아 잡초가 자랐다면, 이는 정원사(하나님)의 설계 때문이 아니라 정원 관리인(인간)의 태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고통은 타락한 창조 세계와 인간의 책임에서 오며,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로마서 8:22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하며, 원죄로 인해 창조 세계가 고통 속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자연적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관련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제 C: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는 고통의 의미를 제공하며, 고통의 존재 자체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된다.

 

반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구원론의 목적을 오해한 것입니다. 로마서 8:28과 욥기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며, 고통은 궁극적으로 의미를 가지지만, 그 존재 자체를 정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고통과 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며, 이는 현재의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는 문제임을 입증합니다. 욥기의 경우, 욥의 고통은 하나님과 사탄의 시험으로 허용되었지만,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섭리가 결국 승리함을 보여줍니다.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책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인간과 세상의 상태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구원을 제공하십니다.

 

병든 사람이 의사의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통증이 있더라도, 그 통증은 병의 원인 때문이지 의사의 책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세상의 상태에서 오며, 하나님은 이를 치유하려 하십니다.

 

교회에서 고통받는 성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3-4, 새번역)라고 설교할 때, 우리는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극복하시려는 문제임을 믿습니다.

 

전제 D: 신학적·철학적 전통은 고통을 하나님의 책임에서 분리하며, 모순은 신비로 이해한다.

 

반증은 신학적·철학적 전통이 고통을 하나님의 책임에서 완전히 분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신학의 신비적 접근을 간과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루이스는 고통을 원죄와 인간 조건의 결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이 모순이 아니라 신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정론 논쟁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설명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성을 반영합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비판은 철학적 관점에 치우쳤지만, 신학은 이성적 설명 이상의 신비를 인정하며,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상태에서 기인함을 유지합니다.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지 않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방의 상태(어두움)와 사람의 행동(불 켜지 않음)이 문제라면, 방 주인(하나님)의 책임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세상 상태와 인간 책임에서 오며, 하나님은 이를 초월적으로 다루십니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그는 고통을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로 보았으며, 이는 신학적 전통이 고통을 하나님 책임에서 분리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2. 판단 (Judgment)

 

반증의 주장을 반박하고 원래 명제의 타당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판단합니다.

 

신비적 이해의 중요성: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이 고통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반증은, 신학의 신비적 본질을 간과합니다. 고통은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관련됩니다. 칼 바르트와 같은 신학자는 이 신비를 인정하며,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상태에서 유래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님을 재확인합니다.

 

인간과 창조 세계의 상호작용: 자연적 고통은 인간의 책임과 창조 세계의 상태에서 기인하며, 원죄가 세상에 미친 영향(로마서 8:22)을 반영합니다. 환경 파괴, 기후 변화, 생태계 불균형은 인간의 선택과 직접·간접적으로 연결되며,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직접적 책임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루이스의 설명은 자연법칙이 고통을 초래할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인간이 성장하도록 허용된 것일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구원론의 우선성: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고통의 존재 자체를 정당화하지 않더라도, 고통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로마서 8:28과 욥기는 고통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목적을 가지며,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는 문제임을 입증합니다. 욥기의 경우, 고통은 시험으로 허용되었지만,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최종적으로 승리함을 보여줍니다.

 

신학적·철학적 균형: 신학적 전통은 고통을 하나님의 책임에서 분리하며, 모순을 신비로 이해합니다. 흄의 비판은 철학적 관점에 치우쳤지만, 신학은 이성적 설명 이상의 신비를 인정하며, 고통이 인간과 세상의 조건에서 기인함을 유지합니다. 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창조 세계의 상태에서 유래함을 재확인합니다.

 

3. 결론 (Conclusion) – 최종 판단

 

따라서,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는 명제는 여전히 참입니다. 반증이 제기한 주장은 고통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성을 오해하거나 과잉 해석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됩니다.

 

신비적 이해의 중요성: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은 고통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지만, 이는 신비로 이해해야 하며, 고통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인간과 창조 세계의 책임: 고통의 대부분은 인간의 자유와 원죄, 그리고 창조 세계의 상태에서 비롯되며,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 책임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구원론의 의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고통을 의미 있게 만들며,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는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신학적·철학적 균형: 신학적 전통은 고통을 인간 조건으로 해석하며, 철학적 비판을 신비로 초월합니다.

 

고통은 단순히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 원죄, 창조 세계의 상태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이를 극복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존재로 작용하십니다. 따라서 이 명제는 기독교 신앙과 논리적으로, 실천적으로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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