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며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 되어 굶주린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이 “저들을 돌려보내자”고 하자(마태복음 14:15), 예수께서는 소년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나누셨고(마태복음 14:19),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습니다(마태복음 14:21). 또 다른 날, 나병환자가 그분 앞에 무릎 꿇자, 사람들이 피하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8:2-3). 그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선포하시며(누가복음 7:50), 그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은 말씀으로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고 새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신약과 구약은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참된 믿음임을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야고보서 2:17에서 야고보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단언하며, 믿음이 실천으로 완성됨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 2:26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며, 믿음과 행동의 불가분성을 더욱 강하게 제시합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행동으로 실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22에서 혈루증 여인이 믿음으로 만지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시며 치유하셨고, 마태복음 14:29-30에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믿음이 즉각 행동으로 나타난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5:16에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좋은 행실을 보게 하라”고 가르치시며, 믿음이 세상을 향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함을 명령하셨습니다.
초기 교회는 믿음을 행동으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2:44-45는 “믿는 자들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니라”며, 믿음이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랑의 행위로 나타났음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4:32-35는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유하며 큰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하며, 믿음이 공동체적 실천으로 열매 맺었음을 증거합니다. 갈라디아서 5:6에서 바울은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느니라”고 썼고, 이는 믿음이 사랑의 행동으로 구체화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3:2도 “믿음이 산을 옮길 만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니라”며, 믿음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무의미함을 역설합니다.
구약에서도 믿음은 행동으로 입증됩니다. 창세기 22:9-12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제단에 바쳤고,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 믿음을 아노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21-22는 이를 인용하며 “그의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결론짓습니다. 히브리서 11:17-19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동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음을 찬양하며, 히브리서 11:8도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니”라며 믿음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출애굽기 14:15-16에서 모세가 믿음으로 홍해를 가르자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난 것도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증거입니다.
예수께서는 믿음과 행동의 연속성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2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일도 하리라”고 하시며, 믿음이 기적과 선행으로 이어짐을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37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며 믿음이 실천으로 완성됨을 가르칩니다. 베드로전서 2:12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리라”며, 믿음의 행동이 복음의 증거가 됨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증언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3.3)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라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하며, 믿음이 박해 속에서도 행동으로 나타났음을 시사합니다. 사도행전 9:36-39의 다비다는 “선한 일과 구제하는 일”로 믿음을 실천했고, 이는 초기 교회의 모범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명확한 가르침, 예수와 제자들의 삶, 구약의 믿음의 모범, 역사적 증거는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살아있는 믿음임을 강력히 증명합니다. 믿음은 말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이루는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행동이 된다는 주장에는 강력한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믿음이 행동이라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천에 실패하고 죄와 나태 속에 머물까요? 로마서 7:15에서 바울조차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것을 행한다”며 믿음과 행동의 괴리를 고백합니다. 현대 신자들도 기도보다 무기력에 빠지거나 선행을 소홀히 하며,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둘째, 유대교는 믿음이 행동으로 완성된다는 관점을 거부합니다. 신명기 6:25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의로움이 되리라”며 율법 준수를 믿음의 증거로 보지만, 야고보서의 행함 강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탈무드(아봇 1:17)는 “말보다 침묵이 낫고 공부가 행함보다 크다”며 실천보다 신앙의 내면성을 우선시합니다. 이는 믿음과 행동의 필연적 연결을 약화시킵니다.
셋째, 이슬람은 믿음이 주로 마음의 고백임을 강조합니다. 꾸란 49:14는 “베두인들이 ‘우리가 믿었다’고 하나… 믿음이 너희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느니라”며, 믿음이 행위보다 먼저 마음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꾸란 2:177은 선행을 칭찬하지만, 이는 믿음의 필수 조건이 아닌 부가적 덕목으로 간주되며, 행동 없이도 신앙이 유지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은 믿음의 실천을 위선이나 감정적 착각으로 치부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기독교의 행위를 권력 추구와 위선으로 보았고,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믿음을 비이성적 감정으로 규정하며 실천을 종교적 자기기만으로 비판합니다. 사도행전 2:45의 재산 나눔도 이상주의적 과장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현대 심리학은 행동을 믿음과 무관한 습관이나 사회적 압력의 결과로 봅니다. B.F. 스키너(《행동주의》)는 인간 행동을 조건 반사로 설명하며 초월적 믿음의 영향을 부정하고, 조나단 하이트(《도덕 심리학》)는 실천이 도덕적 직관이나 학습된 패턴에서 온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믿음이 행동의 근원이라는 주장을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대체합니다.
여섯째, 신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키웁니다. 야고보서 2:17이 행함 없는 믿음을 죽었다고 하며 행동을 요구하지만, 로마서 3:28에서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믿음으로라”며 행함의 필요성을 약화시킵니다. 이는 믿음과 행동의 관계에 대한 혼선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철학적 회의론은 믿음과 행동의 실효성을 문제 삼습니다. 데이비드 흄(《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은 행동의 동기를 믿음이 아닌 욕망과 이성에서 찾으며, 실천이 믿음의 필연적 결과라는 증거를 의심합니다. 세상의 불의와 고난이 여전한 현실은 믿음의 실천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함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실패 사례, 유대교와 이슬람의 반론, 회의론과 심리학의 대안, 신약의 모순, 철학적 의문은 믿음이 행동이 된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킵니다.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믿음과 행동의 관계를 오해하거나 신약의 가르침을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실천에 실패한다며 믿음과 행동의 연결을 의심하지만(로마서 7:15), 이는 믿음의 완전성을 오해한 것입니다. 로마서 7:15-25에서 바울은 죄와의 싸움을 고백하지만, 로마서 8:1-2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음이라”며 믿음이 행동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함을 밝힙니다. 실천의 실패는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 연약함을 극복하는 과정이며, 빌립보서 1:6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완성하시리라”고 보증합니다.
둘째, 유대교가 율법 준수를 믿음의 증거로 본다(신명기 6:25, 탈무드 아봇 1:17)는 행함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지 믿음과 행동의 분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22는 아브라함의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졌다고 하며, 이는 신명기 26:16—“마음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행하라”—와 조화를 이룹니다. 유대교의 율법도 믿음의 실천을 요구하며, 신약은 이를 예수의 사랑으로 완성합니다(마태복음 22:37-40).
셋째, 이슬람이 믿음을 마음의 고백으로 본다(꾸란 49:14, 2:177)는 행동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꾸란 2:177은 “의로움은 얼굴을 동서로 돌리는 데 있지 않고 믿음과 선행을 행하는 데 있다”며 실천을 강조합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2:17과 갈라디아서 5:6—“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한다”—는 믿음이 마음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남을 일치되게 증언합니다. 이슬람의 반론은 강조점 차이일 뿐 본질적 분리를 입증하지 못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이 실천을 위선이나 감정으로 본다(니체, 도킨스)는 믿음의 실체를 간과합니다. 사도행전 2:45의 재산 나눔은 위선이 아닌 공동체적 사랑의 증거이며, 히브리서 11:36-38은 “조롱과 채찍질을 받고 순교한 자들”의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실입니다. 요한일서 3:18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며 위선을 배격하고 참된 믿음의 실천을 촉구합니다. 회의론은 초자연적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 편견입니다.
다섯째, 심리학이 행동을 습관이나 압력으로 본다(스키너, 하이드)는 믿음의 초월적 기원을 무시합니다. 사도행전 9:15-16에서 바울의 회심은 조건 반사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행동이 변화되었고, 고린도후서 5:14-15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사 살게 하셨다”며 믿음이 행동의 근원임을 입증합니다. 심리학은 인간적 메커니즘을 설명할 뿐,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실천을 반박하지 못합니다(로마서 8:14).
여섯째, 로마서 3:28과 야고보서 2:17의 모순으로 보이는 부분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로마서 3:28은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며 구원의 시작을, 야고보서 2:17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었다”며 구원의 열매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2:8-10은 이를 통합—“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하며, 믿음이 행동으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가시(고린도후서 12:7)는 믿음이 연약함 속에서도 “은혜가 족하다”(12:9)로 실천을 이끌었음을 증거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불의가 여전하다는 철학적 의문(흄)은 믿음의 실천이 궁극적 변화를 약속한다는 점을 놓칩니다. 마태복음 25:40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며 실천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요한계시록 21:5는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며 완성을 예고합니다. 믿음의 행동은 즉각적 유토피아가 아닌 구원의 증거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마태복음 5:16).
따라서 반증은 믿음과 행동의 신학적 통합, 역사적 실천, 초월적 동기를 축소 해석한 오류입니다. 신약과 구약의 증언, 예수와 신자들의 삶은 믿음이 행동이 됨을 단호히 입증합니다.
믿음이 행동이 된다는 믿음은 삶 속에서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루 한 번 이웃에게 작은 도움(예: 물건 나눔)을 실천하며 믿음을 보여주세요. 둘째,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기도하며 행동으로 나아가세요. 셋째, 공동체에서 사랑의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는 데 동참해보세요. 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이 살아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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