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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자유를 준다” (마태복음 6:14-15)

by modeoflife 2025. 3. 8.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야기: 예수의 용서의 가르침

 

어느 날,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죄로 더러워진 세상 속에서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답하셨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복음 18:22)。그는 이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6:14)。어느 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군중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마태복음 27:22-23) 죄의 증오를 드러냈을 때, 그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34)。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제자들은 이 장엄한 용서를 보며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을 자유케 함을 깨달았습니다。예수의 용서는 죄와 미움의 사슬을 끊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유의 길을 여셨으며, 이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논증: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증거

 

신약 성경은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을 자유케 하는 강력한 통로임을 확고하고 다층적으로 증언하며, 이는 구속사적, 신학적, 역사적 증거로 입증됩니다。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약속하시며, 용서가 하나님과의 화해와 자유의 근본임을 증거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21-22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라 하여 용서의 무한한 힘을 강조하며, 누가복음 17:3-4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용서하라”라 하여 자유의 실천을 가르치십니다。

 

예수의 사역은 용서가 자유를 주는 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요한복음 8:10-11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라” 하시며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셨고, 누가복음 23:34의 십자가 위 기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는 원수까지 품으시며 증오와 죽음의 사슬을 끊으신 진리의 자유를 증언합니다。마태복음 5:44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 하여 용서가 평안과 자유를 가져옴을 가르치시고, 요한복음 16:33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라 하여 용서의 자유가 하나님의 평화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초기 교회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 용서의 자유를 실천으로 확증합니다。사도행전 7:60에서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 기도하며 박해자를 용서하고 자유의 모범을 보였고, 사도행전 15:8-9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게 하사 자유를 주셨다”라 하여 용서가 공동체를 화해로 이끌었음을 기록합니다。에베소서 4:31-32에서 바울은 “모든 악독과 분노를 버리고 서로 용서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으니라”라 하여, 용서가 사랑으로 자유를 주는 길임을 증거합니다。골로새서 3:13은 “서로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라 하며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자유를 완성함을 강조합니다。

 

역사적 증거도 이를 보강합니다。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3.3)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용서의 가르침으로 공동체를 세우고 박해 속에서도 자유를 누렸다고 기록하며, 플리니우스 더 영거(기원후 112년 편지 10.96)는 기독교인들이 용서와 사랑으로 결속된 삶을 살았다고 전합니다。타키투스(《연대기》 15.44)는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용서의 메시지가 퍼져 자유의 희망을 주었다고 인정합니다。구약 예언은 이를 예표합니다。이사야 1:18은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라 하여 용서의 자유를 예언하고, 시편 32:1-2는 “그 죄를 사하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자유를 얻었도다”라 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암시합니다。

 

신약의 계시는 용서의 자유를 더욱 깊이 드러냅니다。로마서 8:1-2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자유케 하셨느니라”라 하여 용서가 죄의 정죄를 깨는 자유임을 증언합니다。히브리서 10:17-18은 “내가 그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용서함으로 자유케 하셨도다”라 하며, 예수의 용서가 영원한 자유를 보장함을 확언합니다。따라서 신약의 약속, 예수의 사역, 초기 교회의 실천, 사도들의 가르침, 역사적 증언, 구약의 예언은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강력하고도 흔들림 없는 증거입니다。예수의 용서는 죄와 사망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주시는 구속의 열쇠였습니다。

 

 

반증(반대 주장): 정말 용서가 자유를 줄까?

 

그러나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용서가 자유를 준다면 왜 세상은 여전히 미움, 복수, 분쟁으로 가득할까요? 마태복음 6:14-15가 “너희가 용서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신다”고 했지만, 예수 이후 로마의 박해(사도행전 12:2), 중세의 복수 전쟁, 현대의 테러와 보복은 용서의 자유가 현실을 바꾸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욥기 10:14-15는 “내가 죄를 지으면 주께서 벌하시나니 용서로 자유가 오지 않도다”라 하며, 미움과 복수의 지속이 용서의 실효성을 의심케 합니다。

 

둘째, 유대교는 용서가 율법의 정의와 처벌 아래에 있다고 보며, 예수의 방식을 과도하고 비현실적이라 비판합니다。출애굽기 21:24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정의로운 응징을 우선하며, 탈무드(요마 85b)는 “죄에 대한 속죄가 용서를 앞선다”라 하여 용서가 자유로 이어지기보단 율법 준수에 종속된다고 봅니다。레위기 19:17-18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책망하라”라 하며, 예수의 무제한 용서(마태복음 18:22)는 정의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이슬람은 용서가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에 속한다고 하며, 예수의 가르침을 보편적 자유의 근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꾸란 24:22는 “너희가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를 바라라”라 하여 용서가 인간의 자유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음을 강조하고, 꾸란 42:40은 “악에 대한 보상은 동등한 악이라도 용서는 하나님께 속하노라”라 하며 예수의 용서(누가복음 23:34)를 초월적 권한으로 보지 않습니다。꾸란 4:157은 십자가를 부정하며 용서의 자유를 약화시킵니다。

 

넷째, 현대 회의론자들은 용서를 약함이나 감정적 억압으로, 십자가를 패배의 상징으로 치부하며 자유의 증거로 보지 않습니다。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십자가의 용서를 로마 처형의 실패로, 데이비드 흄(《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은 요한복음 8:11의 용서를 도덕적 허약함으로 봅니다。제임스 프레이저(《황금가지》)는 용서를 고대 희생 의식에서 나온 미신적 관습으로 간주하며, 자유가 아닌 착각이라 주장합니다。

 

다섯째, 현대 심리학은 용서가 감정 억제, 망각, 또는 심리적 부담으로 자유를 주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프로이트(《문명의 불만》)는 용서를 억압된 분노의 투사로, 아들러(《개인 심리학》)는 열등감에서 오는 자기기만으로 봅니다。피터 스완슨(《용서의 심리학》, 2018)은 “용서가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하고 복수를 억제할 뿐”이라며, 존 쉘비 스퐁(《새로운 기독교》)은 십자가의 용서를 낭만적 이상으로 간주하여 현실적 자유와 무관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증폭시킵니다。마태복음 6:14-15가 용서로 자유를 약속하지만, 마태복음 12:31-32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리라”라 하여 용서의 보편성을 제한하고, 전도서 3:1-8은 “죽이는 때와 미워하는 때가 있다”라 하며 용서와 자유의 절대성을 상대화합니다。이러한 미움의 지속, 유대교와 이슬람의 반론, 회의론과 심리학의 비판, 성경 내 불일치는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반증에 대한 반박: 의문에 대한 치밀한 답변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신실하심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미움과 복수가 계속된다는 지적(사도행전 12:2, 욥기 10:14-15)은 용서의 자유의 본질과 타이밍을 놓칩니다。마태복음 6:14-15의 “너희가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용서하시리라”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자유를 주는 약속이며, 요한복음 16:33은 “세상에서는 환난이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 하여 미움이 용서의 실패가 아님을 증언합니다。마태복음 18:21-22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현세의 복수를 초월한 자유를 가리키고, 계시록 21:4는 “모든 눈물을 씻기시리라”라 하여 최종 자유를 확증합니다。

 

둘째, 유대교가 정의를 용서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출애굽기 21:24)은 예수의 구속 사명을 오해합니다。마태복음 5:38-39에서 “눈은 눈으로 하지 말고 네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라”라 하시며, 용서가 정의를 완성함을 증거합니다(로마서 12:19-21,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내가 선한 것으로 악을 이기리라”)。이사야 53:5는 “그의 사랑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리라”라 하여 용서가 자유를 주는 진리임을 예언하며, 탈무드의 제한성은 신약 계시로 극복됩니다。

 

셋째, 이슬람이 용서를 하나님의 권한으로만 본다는 반론(꾸란 24:22)은 예수의 중보적 용서를 약화시키지 못합니다。꾸란 42:40의 “용서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누가복음 23:34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와 조화를 이루며, 히브리서 7:25는 “예수께서 중보로 구원하심이라”라 하여 그의 권한을 증언합니다。꾸란 4:157의 십자가 부정은 요한일서 2:2의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라”로 반박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이 용서를 약함으로 치부한다는 주장(도킨스, 흄)은 역사적·성경적 실체를 무시합니다。요한복음 8:11의 “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라”는 용서가 자유의 새 생명을 주었음을 증거하고, 고린도전서 15:17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가 용서되었으니 믿음이 헛되지 않다”라 하여 패배가 아님을 입증합니다。흄의 도덕 약함론은 로마서 5:8의 “죄인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다”를 약화시키지 못하고, 프레이저의 미신론은 사도행전 7:60의 “이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로 반박됩니다。

 

다섯째, 심리학이 용서를 억제나 망각으로 본다는 반론(프로프트, 스완슨)은 하나님의 용서의 능력을 오해합니다。에베소서 4:32의 “서로 용서하라 이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과 같으니라”는 억제가 아닌 자유의 능력을 증언하며, 골로새서 3:13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라 하여 용서가 사랑으로 자유를 줌을 증거합니다。스완슨의 트라우마론은 히브리서 10:17의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로 극복되고, 아들러의 기만론은 요한복음 16:20의 “너희 슬픔이 기쁨이 되리라”로 반박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마태복음 12:31-32, 전도서 3:1-8)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마태복음 12:31-32의 용서 제한은 회개 없는 죄를 뜻하며, 누가복음 17:4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라 하여 자유의 보편성을 증언합니다。전도서 3:1-8의 상대성은 요한일서 1:9의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심으로 자유케 하시리라”로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반증은 용서의 자유를 현실적 미움이나 인간 논리로만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신약의 증언, 구속사적 완성,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입증합니다。

 

적용: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믿음의 실천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미움 속에서도 마태복음 6:14-15를 묵상하며 용서의 자유를 붙잡으세요. 둘째, 하루 한 번 예수의 용서를 본받아 하나님께 화해와 평안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원수를 용서하며 예수의 사랑으로 자유의 증인이 되세요. 이는 용서가 자유를 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 명제로 풀어보는 구약 그리고 신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