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지라도 해를 당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땅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것임이라."
이스라엘 땅은 죄로 인해 전쟁으로 찢겨 있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서로 칼을 겨누며, 들판은 심판의 흔적으로 물들었습니다(이사야 10:4). 그때 하나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황폐한 언덕에 서서 힘있게 선포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리라!”(이사야 11:6) 그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권위로 울려 퍼졌습니다. 한 백성이 “어떻게 평화가 오겠느냐?”고 물었을 때, 이사야는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아니하리니,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여 정의가 평화를 이루리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전했습니다(이사야 11:8-9).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은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정의로 평화를 주시리라”며 기도했습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계시하며, 죄와 분쟁의 혼란 속에서 메시아의 정의가 가져올 평화로운 왕국을 백성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평화가 정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온다는 것을 확고하고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이사야 11:6-9에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땅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것이라”고 하시며, 정의로운 메시아 왕국의 평화로운 비전을 제시합니다. 이사야 11:4는 “그가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의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구원하리라”고 하여, 정의가 평화의 기초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사야 9:7은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하시고 평화가 무궁하리라”며 이 둘의 통합을 확증합니다.
시편은 이 진리를 찬양으로 증거합니다. 시편 85:10은 “인자와 진리가 만나고 공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고 하여, 정의가 평화를 낳는 하나님의 질서를 노래합니다. 시편 72:3은 “공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평화를 이루고 작은 산들이 의를 열매 맺으리라”라 하며, 공의로운 통치가 평화의 토대임을 강조합니다. 미가 4:3은 “그가 열방 사이에 공의로 다스리시리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정의가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는 기초임을 예언합니다.
예레미야는 이 증거를 구체화합니다. 예레미야 23:5-6은 “다윗에게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니 그가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것이요…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라 하시며, 메시아의 정의가 평화로운 구원을 가져옴을 약속합니다. 예레미야 33:15-16은 “그가 공의와 정의로 땅을 심판하리라”며 이 평화의 영속성을 보장합니다. 스가랴 9:10은 “그가 열방에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리라”고 하시며, 스가랴 8:16-17은 “진실과 정의로 판단하라”가 평화의 전제임을 증언합니다.
호세아는 정의와 평화의 연결을 하나님의 은혜로 드러냅니다. 호세아 2:18-19은 “내가 그 날에 새 언약을 맺어 평화를 주리니 내가 인자와 정의로 너와 약혼하리라”고 하여, 정의로운 회복이 평화로 이어짐을 약속합니다. 창세기 15:15-16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복을 받아 평안하리라”고 하며, 정의로운 언약이 평화의 뿌리임을 암시합니다. 신명기 16:20은 “너는 정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고 평안을 누리리라”며 이 둘의 불가분성을 증거합니다.
구약의 역사적 예표와 예언은 이 약속을 실현으로 강화합니다. 출애굽기 23:25-26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축복하사 평안을 주시리라”며 정의로운 순종의 결실을 보여주고, 이사야 32:17은 “공의의 열매는 평화가 되리라”로 정의가 평화의 근원임을 확언합니다. 신약에서 요한일서 2:29는 “의로우신 줄을 아는 자마다 의를 행하나니”라 하여, 메시아의 정의가 평화를 완성함을 입증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비전, 시편과 미가의 찬양, 예레미야와 스가랴의 예언, 호세아와 구약의 일관성은 평화가 정의와 함께 온다는 강력하고도 흔들림 없는 증거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메시아의 정의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평화가 정의와 함께 온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정의가 평화를 가져온다면 왜 전쟁과 불의가 역사와 현대를 계속 지배할까요? 이사야 11:6-9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리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했고(열왕기하 17:6, 예레미야 52:11), 현대의 전쟁과 억압은 정의와 평화의 공존을 의심케 합니다. 시편 74:20은 “땅에 폭력이 가득하니 언약을 돌아보소서”라며 정의 속 평화의 부재를 한탄하고, 현실의 갈등은 약속의 실현성을 약화시킵니다.
둘째, 현대 철학은 평화를 정의와 분리된 타협이나 권력 균형으로 간주하며 초월적 연계를 의심합니다. 홉스(《리바이어던》)는 평화를 사회계약에 의한 폭력 억제 효과로 보며 정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칸트(《영구 평화론》)는 평화를 이성적 합의로만 가능케 하여 이사야 11:4의 정의로운 통치를 비현실적 이상으로 비판합니다. 이는 평화와 정의의 신성한 결합을 약화시킵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적 허구로 간주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이사야 11장의 평화 비전을 고대 근동 신화,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의 《엔키와 닌후르사그》처럼 자연의 조화를 과장한 상상으로 비판합니다. 이사야 11:9의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리라”는 실증적 증거 없는 공상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넷째, 이슬람은 평화를 인정하되 정의와의 관계를 다르게 보며 이스라엘 중심성을 부정합니다. 꾸란 2:224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더 가까움이라”고 하지만, 꾸란 4:135의 정의는 법적 공정에 초점을 맞춰 이사야의 메시아적 정의와 다릅니다. 힌두교의 《바가바드 기타》 16:1-3은 평화를 개인의 덕성과 분리하고, 불교의 《법구경》 5는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고 사랑으로 풀린다”며 정의 없이 평화를 추구합니다.
다섯째, 고대 신화는 평화를 신의 변덕이나 무관심의 산물로 묘사하며 구약의 주장을 약화시킵니다. 그리스 신화의 에우메니데스는 복수와 평화가 신들의 변덕으로 얽히고(《오레스테이아》),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는 신들의 불일치로 평화가 좌절됩니다. 이는 정의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약속의 신뢰성을 의심케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증폭시킵니다. 이사야 11:6-9가 평화와 정의를 약속하지만, 요엘 3:10은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라”며 전쟁을 예고하고, 전도서 3:8은 “평화의 때와 전쟁의 때가 있다”라며 정의와 평화의 일관성을 부정합니다. 이러한 전쟁의 지속, 철학적 타협론, 회의론, 종교적 차이, 신화적 대조, 성경 내 불일치는 평화가 정의와 함께 온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평화가 정의와 함께 온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신실하심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전쟁이 계속된다는 지적(열왕기하 17:6, 예레미야 52:11)은 평화와 정의의 타이밍과 본질을 놓칩니다. 이사야 11:6-9의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리라”는 즉각적 평화가 아닌 메시아의 정의로운 통치로 완성될 궁극적 비전이며, 이사야 11:4는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리라”로 정의가 평화의 기초임을 증언합니다. 시편 74:20의 폭력은 죄에 대한 심판(이사야 10:1-4)이며, 이사야 32:17은 “공의의 열매는 평화가 되리라”로 그 실현을 확증합니다. 전쟁은 약속의 부재가 아닌 준비 과정입니다.
둘째, 현대 철학이 평화를 타협으로 본다는 주장(홉스, 칸트)은 하나님의 초월적 계획을 간과합니다. 홉스의 사회계약은 인간적 억제를 다루나, 미가 4:3의 “공의로 다스리시리니 칼을 보습으로 만들리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평화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칸트의 이성적 합의는 세속적 이상이나, 시편 85:10은 “공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며 신성한 통합을 증거합니다. 철학은 정의와 평화의 구속적 결합을 축소한 오류입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이 이사야를 신화로 치부하며 평화를 허구로 보는 것(도킨스)은 역사적·신학적 증거를 무시합니다. 이사야 11장은 앗수르 위협(기원전 701년, 열왕기하 18:13)을 배경으로 하며, 이사야 9:7은 “공평과 정의로 평화가 무궁하리라”로 실현성을 예고합니다. 《엔키와 닌후르사그》의 상상과 달리, 스가랴 9:10은 “그가 열방에 화평을 전하리라”며 구체적 평화를 증언합니다. 도킨스의 허구론은 예언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 단견입니다.
넷째, 이슬람이 정의와 평화의 관계를 다르게 본다는 반론(꾸란 2:224)은 구약의 독특성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꾸란 4:135의 공정은 이사야 11:4의 “정의로 세상을 구원하리라”와 본질적 공의를 공유하며, 예레미야 23:5는 “의로운 가지로 평화를 이루리라”로 메시아적 통합을 강조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개인적 평화와 달리, 호세아 2:18은 “내가 평화를 주리라”며 하나님의 주도적 정의를 약속합니다.
다섯째, 고대 신화가 평화를 변덕으로 본다는 지적(에우메니데스, 길가메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오해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혼란과 달리, 이사야 54:10은 “평화의 언약이 요동하지 아니하리라”며 영원성을 보장하고, 시편 72:7은 “의로 말미암아 평화가 풍성하리라”로 실현을 입증합니다. 길가메시의 무관심과 달리, 하나님의 평화는 정의의 결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요엘 3:10, 전도서 3:8)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 요엘 3:10은 심판의 준비이나, 요엘 2:28-29는 “그 후에 내가 평화를 주리라”로 회복을 약속합니다. 전도서 3:8은 현 세상의 순환을 말하지만, 스가랴 8:16-17은 “진실과 정의로 평화를 이루라”며 궁극적 통합을 확언합니다.
따라서 반증은 평화와 정의를 현실적 전쟁이나 인간 논리로만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 구약의 예언, 하나님의 신실하심, 구속사적 완성은 평화가 정의와 함께 온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입증합니다.
평화가 정의와 함께 온다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갈등 속에서도 이사야 11:6-9를 묵상하며 정의로운 평화를 소망하세요. 둘째, 하루 한 번 공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구체세요. 셋째, 불공정을 마주할 때 정의를 실천해 평화를 증진시키세요. 이는 평화가 정의와 함께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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