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으니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유다 백성은 죄로 인해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위협이 임박하며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이사야 8:4). 그때 하나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이사야는 황폐한 땅에 서서 힘있게 선포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으니!”(이사야 9:6) 그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백성 중 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겠느냐?”고 물었을 때, 이사야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이라”고 대답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전했습니다(이사야 9:6). 이 말씀을 들은 일부 백성은 믿음으로 고개를 들었고, “메시아가 우리의 희망이시다”라며 소망을 붙잡았습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계시하며, 죄와 절망 속에서 메시아를 통해 오는 희망의 빛을 백성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통해 백성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임을 확고하고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이사야 9:6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하시며, 메시아가 구원의 희망임을 선포합니다. 이사야 9:7은 “그의 정권이 공평과 정의로 굳게 서리라”며 이 희망이 영원한 평화와 하나님의 통치로 완성됨을 보증합니다. 이사야 9:2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라며, 메시아가 절망의 어둠을 뚫고 희망의 빛을 비춤을 예언합니다.
미가 5:2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다스리는 자가 나오리니… 그 기원은 옛적부터니이다”라며, 메시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백성의 희망으로 오심을 계시합니다. 이 약속은 이사야 11:1-2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리라”와 연결되며, 메시아의 정의와 지혜가 희망의 근거임을 보여줍니다. 시편은 이 희망을 찬양으로 확증합니다. 시편 72:2-4는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심판하사… 억압받는 자를 구원하리로다”라며, 메시아의 공의로운 통치가 백성에게 구원과 희망을 가져옴을 노래합니다.
예레미야는 메시아의 구체적 역할을 강화합니다. 예레미야 23:5-6은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 일으키리니 그가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라며, 메시아가 죄와 불의 속에서 희망을 주시는 구원자임을 밝힙니다. 다니엘 7:14는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시리니 그 나라는 영원히 서리라”고 하여, 메시아의 영원한 왕국이 백성에게 흔들리지 않는 희망임을 예고합니다. 호세아 6:2는 “그가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를 일으키시리라”며, 메시아가 죽음과 절망 속에서도 부활의 희망을 주심을 암시합니다.
구약의 다른 증언들도 이 희망을 뒷받침합니다. 창세기 49:10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만민이 복종하리라”며, 메시아가 언약 백성과 열방의 희망임을 예언합니다. 스가랴 9:9-10은 “의로우신 구원자가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바다 끝까지 이르리라”라며, 메시아의 구원과 평화가 온 땅에 희망을 퍼뜨릴 것임을 약속합니다. 이사야 53:5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 징계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리라”며, 메시아의 고난이 죄인을 위한 희망의 대가임을 계시합니다.
구약 전체의 흐름은 메시아를 희망의 중심으로 제시합니다.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이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은 메시아의 임재가 희망의 기초임을 보여주고, 말라기 4:2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를 베풀리라”며 메시아의 최종 승리를 예언합니다. 신약에서 마태복음 1:21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리라”며 이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됨을 입증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 미가와 시편의 약속, 예레미야와 다니엘의 증언, 호세아와 구약의 일관된 계시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백성과 온 세상의 희망이라는 강력하고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메시아는 죄와 절망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십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희망이라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각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메시아가 희망이라면 왜 고난과 불의가 여전히 세상을 지배할까요? 이사야 9:6이 “평강의 왕”을 약속했지만,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했고(이사야 39:6-7), 현대의 전쟁, 기아, 억압은 희망의 실현을 의심케 합니다. 욥기 21:7은 “악인이 형통하며 오래 사는도다”라며 고난 속 희망의 부재를 한탄하고, 메시아의 구원이 아직 오지 않은 듯 보입니다.
둘째, 현대 철학은 메시아적 희망을 허상이나 인간의 망상으로 간주하며 근본적으로 의심합니다.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희망을 허무주의적 삶에서의 도피로 비판하며, 메시아를 약자의 자기기만으로 봅니다. 마르크스(《공산당 선언》)는 종교적 구원을 계급 억압의 도구로 치부하며, 이사야 9:6의 약속이 사회적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공허한 말이라 주장합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적 내러티브로 간주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메시아 이야기를 고대 근동의 신화,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처럼 인간의 불멸 욕망에서 나온 허구로 비판합니다. 이사야 9:2의 “큰 빛”은 실증적 근거 없는 상상에 불과할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넷째, 다른 종교는 메시아를 인정하더라도 구원의 내용과 맥락이 다릅니다. 이슬람의 꾸란 3:45는 예수(이사)를 메시아로 부르나, 단지 선지자일 뿐(꾸란 4:171) 구약의 전능하신 하나님과는 달리 구원의 범위가 제한적입니다. 힌두교의 《바가바드 기타》 4:7-8은 크리슈나가 구원자로 오지만 윤회 속 구원이고, 불교의 《법구경》 165는 구원을 개인 수행에 맡기며 메시아적 희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고대 신화는 구원자를 신의 변덕이나 무관심의 산물로 보며 구약의 주장을 약화시킵니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는 구원자적 영웅이지만 신들의 장난감으로 고난을 겪고(《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바빌로니아의 우트나피슈팀은 홍수에서 구원받았으나 신들의 일관성 없는 결정에 의존합니다(《길가메시 서사시》). 이는 메시아가 희망이라는 약속의 신뢰성을 의심케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증폭시킵니다. 이사야 9:6-7이 평화를 약속하지만, 이사야 63:3은 “내가 분노로 그들을 밟았도다”라며 메시아의 심판을 묘사하고, 전도서 1:15는 “구부러진 것을 펼 수 없다”며 희망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이러한 현실적 고난, 철학적 허무, 회의론, 종교적 차이, 신화적 대조, 성경 내 불일치는 메시아가 희망이라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메시아가 희망이라는 진리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본질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고난이 끝나지 않았다는 지적(이사야 39:6-7, 욥기 21:7)은 메시아적 희망의 타이밍과 성격을 놓칩니다. 이사야 9:6-7의 “평강의 왕” 약속은 즉각적 평화가 아닌 궁극적 구원을 뜻하며, 이사야 9:2의 “큰 빛”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시작됩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도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욥 19:25)라며 희망을 붙잡았고, 욥 42:10에서 회복을 받았습니다. 하박국 2:3은 “그 기한이 차면 속히 이루어지리라”며 메시아의 희망이 하나님의 때에 완성됨을 보증합니다.
둘째, 현대 철학이 희망을 허상으로 본다는 주장(니체, 마르크스)은 하나님의 초월적 약속을 간과합니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인간적 절망을 다룰 뿐, 이사야 11:9의 “땅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리라”는 메시아의 구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마르크스의 억압론은 세속적 종교를 비판하지만, 예레미야 23:5-6의 “의로운 가지”는 물질적 혁명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로 희망을 줍니다. 철학은 메시아의 신성을 축소한 오류입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이 이사야를 신화로 치부하며 희망을 허구로 보는 것(도킨스)은 구약의 역사성과 예언적 실현을 무시합니다. 이사야 9:6은 앗수르 위협(이사야 8:4)이라는 실제 맥락에서 주어졌고, 이사야 44:28의 고레스 예언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절망과 달리, 시편 72:11은 “만국이 그를 섬기리로다”라며 메시아의 실질적 희망을 증거합니다. 도킨스의 허구론은 예언의 성취를 이해하지 못한 단견입니다.
넷째, 다른 종교의 구원 차이(꾸란 3:45, 바가바드 기타 4:7-8, 법구경 165)는 구약의 메시아적 희망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이사(꾸란 4:171)는 선지자이나, 이사야 9:6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신적 구원자로 구분되며 본질적 희망을 공유합니다. 힌두교의 크리슈나와 불교의 수행은 개인 중심이나, 미가 5:2는 “만민을 다스리는 자”로 메시아의 보편적 희망을 제시합니다. 구약의 메시아는 하나님의 구속으로 완성됩니다.
다섯째, 고대 신화가 구원자를 변덕으로 본다는 지적(헤라클레스, 우트나피슈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오해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변덕과 달리,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영원한 희망입니다. 창세기 49:10은 “만민이 복종하리라”며 메시아의 일관된 통치를 약속하고, 이는 신의 변덕이 아닌 신뢰할 구원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이사야 63:3, 전도서 1:15)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 이사야 63:3의 심판은 불의한 자를 향한 것이며, 이사야 53:5는 “그의 징계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리라”며 희망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전도서 1:15는 세상 한계를 말하지만, 다니엘 7:14는 “그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며 메시아의 희망이 초월함을 확언합니다.
따라서 반증은 메시아적 희망을 현실적 고난이나 인간 논리로만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 구약의 예언, 하나님의 신실하심, 역사적 성취, 궁극적 구원은 메시아가 희망이라는 진리를 확고히 입증합니다.
메시아가 희망이라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어려움 속에서도 이사야 9:6을 묵상하며 메시아의 평강을 신뢰하세요. 둘째, 하루 한 번 메시아의 구원을 기억하며 소망을 다지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메시아의 희망을 나누며 위로를 전하세요. 이는 메시아가 우리의 참된 희망임을 삶으로 드러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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