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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과 우울, 하이데거의 영성

modeoflife 2025. 4. 17. 19:24

 

불확실성과 우울, 하이데거의 영성

 

서울의 밤거리엔 형형색색 네온이 빛난다. 그러나 그 빛 아래를 걷는 우리는 종종 한없이 어둡다. 경제 전망은 불투명하고, 전쟁과 기후 재난의 속보가 스마트폰 화면을 끊임없이 갱신한다. “확실한 것”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고, 마음은 먹먹한 우울에 잠식된다. 이 불확실성과 우울의 시대에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가 남긴 사유, 특히 말년에 붙들었던 ‘영성’ 혹은 ‘사유의 수행’은 의외의 빛을 던져 준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불안을 모든 정동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꼽았다. 공포가 다가오는 폭우나 떨어질 주가처럼 구체적 대상에 묶여 있는 반면, 불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앞에서 세계 전체가 낯설어지고, 나는 그 낯섦 속에 던져진다. 이 불안은 몹시 불편하지만 동시에 존재 자체가 다시 열리는 순간이다. 일상의 익숙함이 깨질 때 비로소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존재론적 깊이에서 묻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우울은 에너지 고갈과 자존감 하락, 세계와의 연결 붕괴로 나타난다. 하이데거가 분석한 ‘세계의 몰락’과 닮았으나, 불안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반면 우울은 그 지평을 접어 버린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은 무게를 잃고 축소된다. 하이데거식 영성의 관건은 불안의 문턱을 지나면서도 우울의 늪에 빠지지 않는 길을 찾는 데 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시대, 가족, 유전자, 사회구조 속에 던져진 존재다. “왜 나는 여기, 지금인가?”라는 물음은 답이 없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 던져짐을 소극적 운명론으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삶을 빚으라는 호명을 받았다고 해석했다. 불확실성은 지정된 루트가 없음을, 다시 말해 새로운 길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스스로 수신할 수 있느냐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영성 개념이 등장한다.

가톨릭 신학생으로 출발했으나 하이데거는 제도 종교 대신 ‘사유의 길’을 택했다. 말년에 강조한 Gelassenheit, 곧 ‘내맡김’ 또는 ‘놓아둠’이라는 태도는 사물들을 그들 자신 안에 머물게 하라는 요청이다. 확실성을 생산하려는 계산의 의지로부터 물러나 존재가 스스로 빛나도록 허용하는 느린 자세다. 이 Gelassenheit는 수도원의 명상과 닮았으나 그 대상이 초월적 신이 아닌 존재 그 자체라는 점이 다르다. 하이데거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와 안개, 돌계곡이 불러오는 침묵 속에서 존재의 숨결을 듣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정보 과잉과 디지털 소음은 그의 ‘놓아둠’과 극단적 대조를 이룬다.

하이데거식 영성이 불확실성과 우울을 견디는 데 건넬 수 있는 실천적 조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려는 계산적 사고에서 잠시 벗어나 몸과 호흡,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전환이다. 존재가 속삭이는 미세한 울림이 들릴 것이다. 둘째, 커리어와 재테크 같은 측정 가능 목표만을 인생 프로젝트로 삼지 말고 삶을 ‘가능성들의 열림’으로 바라보라는 제안이다. 가능성은 목표와 달리 무한하고 개방적이다. 셋째, 불안과 우울의 터널에 갇힐 때 타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요청이다. 고백과 경청, 침묵과 다시 고백이 순환할 때 존재의 공간은 넓어진다.

결국 하이데거의 영성은 초월적 위로가 아니라 존재론적 각성을 권한다. 불확실성은 미지의 공포가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이다. 우울은 그 가능성이 폐쇄된 상태이지만, Gelassenheit와 경청으로 다시 길을 틔울 수 있다. 하이데거가 죽기 전까지 고향 숲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나무 그늘 사이로 흘러드는 변덕스러운 빛이 바로 불확실성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빛은 매 순간 다르게 쏟아지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 새로운 그림자를 그린다.

우리는 확실성을 갈망하지만 삶은 언제나 “아무것도 아닌 것”의 어둠을 품고 다닌다. 하이데거는 그 어둠 속 불안을 응시하라고 말한다. 다만 거기 머무르지 말고, 놓아두고 경청하며 함께 존재하라고 속삭인다. 서울의 붉은 네온 아래를 걷는 지금, 당신의 마음에 불안이 스쳐 간다면 그 불안을 두려움으로 축소하지 말고 가능성의 호흡으로 키워 보라. 언젠가 우울이 찾아오더라도 Gelassenheit의 깊은 침묵 속에서 존재가 들려줄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성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미지의 동반자다. 그 동반자에게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저 붉은 빛을, 새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