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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필연적이다

modeoflife 2025. 4. 6. 15:58


1. 논증: 용서가 필연적이라는 근거

도덕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며, 이제 용서라는 핵심 덕목에 주목할 때입니다. 이 명제는 용서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기독교적 삶에서 불가피한 요구입니다. 먼저, 용서의 필요성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친구에게 "넌 늘 늦어!"라며 화를 내고 나서 마음이 무겁다고 느낀다면, 이는 용서 없이는 평화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동료가 실수로 여러분의 노력을 무시했다고 해보세요. "괜찮다"고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가 쌓여 관계가 망가지고 내면이 어지러워집니다. 용서는 필연적입니다. 이는 관계와 내면의 조화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용서의 필연성은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약속을 잊고 친구를 기다리게 했다면, "미안하다"는 사과를 기대하겠죠. 마찬가지로, 누군가 여러분을 아프게 했을 때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 상호성은 용서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14-15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용서가 필연적임을 명확히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막힙니다.

 



용서의 필연성은 사회적 차원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동네에서 이웃과 다투고 "너랑 말 안 해!"라며 등을 돌린다고 해보세요. 이 갈등이 계속되면 공동체가 분열됩니다. 반대로, "용서한다"고 손을 내밀면 화해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회복됩니다. 역사적으로도 용서가 필연적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가 억압자들을 용서하며 화해를 이끈 사례는 용서가 사회를 치유함을 보여줍니다. 용서는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필연적 행위입니다.

용서의 필연성은 내면의 치유에서도 확인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미워하며 "절대 용서 못 해"라고 다짐하면, 그 미움은 여러분을 갉아먹습니다. 반면, "놓아주자"고 용서하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고린도후서 2:7은 "도리어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하며, 용서가 필연적 치유임을 증언합니다. 용서는 필연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간 삶의 본질적 요구입니다.

2. 반증: 용서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주장

용서가 필연적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에서 용서를 "약자의 도덕"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그는 "강자는 복수하고, 용서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여러분을 배신하면 "용서 대신 보복이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는 『이성적 감정 행동 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에서 "용서는 감정적 의존"이라며, "화를 버리고 무관심해지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종교적 반론도 있습니다. 불교는 "용서보다 초월"을 강조하며, "화를 업으로 받아들이고 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유교는 "의(義)에 따라 처벌이 우선"이라며, 용서가 항상 필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일상에서도 "용서는 선택이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날 배신했는데 왜 용서해야 하나?"거나 "용서하면 또 당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들은 용서가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3. 반증에 대한 반박: 용서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용서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니체의 "복수" 주장은 분노의 대가를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동료의 배신에 "복수하겠다"고 칼을 간다면, 그 과정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더 황폐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복수가 끝나도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용서는 약함이 아니라, 강한 자의 치유입니다. 엘리스의 "무관심" 주장도 약합니다. "화를 버린다" 해도, "괜찮다"고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의 갈등을 무시하면 내면에 상처가 남고, 언젠가 터집니다. 용서는 감정적 의존이 아니라 필연적 해방입니다.

불교의 "초월"은 고통을 다루지만, 관계의 치유를 놓칩니다. 예를 들어, 이웃과 다투고 "업이라 놓자"고 해도, "용서한다"는 말 없이는 서로 어색함이 남습니다. 유교의 "처벌 우선"도 한계가 있습니다. 의에 따라 처벌해도, "용서 없이 끝났다"면 공동체에 갈등의 씨앗이 남습니다. 일상의 "선택" 주장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용서 안 해도 된다"가 맞다면, 왜 미움이 여러분을 괴롭힐까요? "또 당한다"는 걱정도 반박됩니다. 용서는 약함을 주는 게 아니라, 경계를 세우며 치유합니다. 예를 들어, "널 용서하지만 다시 신뢰하려면 시간이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용서의 필연성을 명확히 합니다. 마태복음 18:21-22에서 예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며, 용서가 선택이 아닌 필연임을 증언합니다. 용서는 필연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자 삶의 회복입니다.

4. 실천: 용서의 필연성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

용서의 필연성을 실천하며 그 깊이를 깨달아보세요.  

- 말씀 묵상: 매일 20분 동안 마태복음 6:14-15—“너희가 용서하면”—와 고린도후서 2:7—“용서하고 위로하라”—를 읽고, “오늘 내가 용서하지 못한 순간은 언제였나? 친구의 늦음에 화냈나, 동료의 실수에 짜증냈나?”를 깊이 묵상해보세요. 묵상 후 "왜 용서가 필요했나, 어떻게 할까?"를 적어보세요.  
- 일상 관찰: 하루 동안 용서가 필요한 순간을 상세히 기록해보세요. "이웃의 무례에 분노", "가족의 오해에 상처", "용서 후 평화" 등을 구체적으로 적고, “용서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였을까? 관계와 내면에 어떤 변화가 왔나?”를 분석해보세요. 예를 들어,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계속 불편했을 것"을 고민해보세요.  
- 작은 행동: 용서를 필연적으로 실천해보세요. 화가 날 때 "왜 화났나?"를 5분간 탐구한 뒤, "용서한다"고 말하거나 마음으로 놓고, “이 용서가 내 마음과 관계를 어떻게 치유했나?”를 느껴보세요. 예를 들어, 친구에게 "괜찮다"고 문자 보내고 경계를 세우며, 하루 끝에 "용서의 필연성이 나를 어떻게 자유롭게 했나?"를 기록하고, 다음 날을 위해 "어떤 용서를 더할까?"를 계획해보세요.

결론

용서는 필연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관계와 내면을 치유하는 불가피한 길입니다.

추가(순전한 기독교 본문 일부)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그에게 벌을 주며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어란 말인가?” 거기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의 피조물로 만들 수도 있는 그 작은 흔적이나 꼬인 자국입니다.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서는 안 됩니다.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결코 자리잡지 못하도록 그런 마음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결심만 하면 다시는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제 말은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날마다, 해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시도할 수조차 없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적을 죽이거나 벌해야 할 때라도 자기 자신에 품는 마음을 그에게도 품도록—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서는 다른 세상에서는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애써야 합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거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되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 명제로 풀어보는 순전한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