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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신학의 전환과 명제에 대한 비판

modeoflife 2025. 3. 28. 17:17

 

(1) 계몽주의, 이성주의의 도전: 신학 명제의 검증 가능성 문제

 

18세기에 접어들자, 유럽 사회에서는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새로운 기류가 세차게 불어닥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 이성이 더욱 빛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불가사의해 보이거나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점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지요. 과학과 철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뉴턴의 물리학이 우주 원리를 설명할 때 ‘보이지 않는 신적 작용’보다 ‘자연 법칙’을 강조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교리가 제시하는 명제가 정말 현실에서 증명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어쩌면 자연스레 제기된 것이지요.

 

이른바 “이성주의(Deism)”라고 불리는 사조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인정하되, 그분께서 자연 법칙을 마련해 놓은 뒤 더 이상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교리 명제는 일상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하나님은 우주의 원리를 만드셨으나 그 뒤로는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식의 단순한 신앙고백이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지요. 이런 입장은, “굳이 예수님의 신적 본성이나 기적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다가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여러 학자가 초자연적 현상이나 기적을 전통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 같은 교리는 과학 실험으로 증명하기 어렵고, 논리적으로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그러니 교회가 오랜 세월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라고 주장해 온 명제들이, 18세기 계몽주의 인텔리들에게는 “합리적으로 검증할 길이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교회 쪽에서 그동안 신학적 명제를 “전통과 권위가 보증하니 믿어라” 수준으로 말해 온 측면도 없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제 사회 분위기가 “모든 지식은 인간 이성과 경험을 통해 점검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외치면서, 교회가 붙들던 명제들도 덩달아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삼위일체론, 성육신 교리,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등등은 그 본질상 과학적 관찰로 증명하기 어려우니, 일부 사람들에게는 마치 “신화적 이야기”로 간주되기도 했지요.

 

명제 하나하나가 교회의 선언으로는 확실해 보여도,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게 이성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나?”라는 근본적 의심이 일어났고, 그것이 신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명제 중심으로 탄탄해 보였던 정통주의 신학도, 이성과 과학의 거센 파도 앞에서 전에 없던 흔들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정말로 지켜야 할 교리 명제와 그렇지 않은 것 사이를 어떻게 구분하냐는 문제나,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이를 합리적으로 해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쏟아졌고, 그 물음들은 곧바로 근대 신학의 커다란 변곡점이 됩니다.

 

(2) 슐라이어마허, 리츨, 하르낙 등 '감정·역사' 중심 신학과 명제

 

근대 초반, 계몽주의 이후의 흐름 속에서, 교리 명제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되기 어렵다는 비판이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이 와중에, 일부 신학자들은 교리나 교회 전통이 말하는 “명제” 자체가 신앙의 본질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보게 되지요. 왜냐하면 신앙은 사실상 “내면의 감정이나 실존적 체험”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이를 단지 교리 문장으로 고정해 놓는 건 진짜 신앙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대표주자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입니다. 그는 “종교란 절대 의존감(Gefühl)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교리나 교회가 설정해 둔 명제보다 ‘내적인 신앙 체험’이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세분화된 교리 문장을 하나씩 암송하기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철저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감정’, 곧 내적 관계가 신앙의 뿌리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같은 교리 자체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전폭적인 의존감을 느끼고, 그것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가 종교의 본질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이나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같은 신학자들도 교리 명제가 오랜 역사·문화적 층위에서 형성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교부들이나 공의회가 삼위일체를 결정한 배경은 그 시대 철학·정치·교회 권력 관계 속에서 나온 합의 아니겠느냐”는 식이죠. 그러니 “그 내용이 영원 불변의 진리”라고 무턱대고 못 박기보다는, 시대적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종교가 본래 인간의 삶·역사 속에서 경험되는 현상이라는 전제를 강하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명제 중심 신학이 의심받고, 대신 ‘감정·역사’가 부각되면서, 한편으로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교리 명제들—예컨대 삼위일체나 성육신—이 너무 딱딱한 형식으로 고정되어, 오히려 인격적 만남과 영적 체험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생겨납니다. 교회가 “하나님은 이렇게만 이해해야 한다”는 명제들을 만들어 놓으면, 자유롭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실제 임재를 체험해야 할 성도들이 오히려 그 틀에 갇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들이 “교리적 명제 자체를 무시하자”고 주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 교회가 ‘정통주의’라는 이름으로 쌓아 온 명제 중심 교리에 대해서는, “신앙의 본질인 인격적 관계”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며 일침을 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후대에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이라 불리는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전통적 교리 문장(명제)과 개인적·실존적 신앙 체험 사이의 간극을 더 깊이 파고드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슐라이어마허가 “절대 의존감”으로 종교를 정의하고, 리츨·하르낙이 교리의 역사·문화적 형성을 부각함으로써, 종교개혁 이후 꽤 단단해 보였던 교리 명제 체계가 다시 한번 해체 또는 재조명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명제 중심의 교리 해설에 대한 회의가 퍼져 나갔고, 교인들이 “정말 내가 믿는 게 명제인지, 아니면 인격적 체험인지”를 고민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감정·역사’ 중심 신학은 근대 시기에 교회가 처한 문명사적 변화를 반영하며, 신학의 초점을 “내면적·실존적 신앙”으로 이동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19세기~20세기 초 '정통주의 vs. 자유주의' 프레임에서의 명제 해석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접어들자, 신학계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정통주의(Orthodoxy)”와 “자유주의(Liberalism)”의 대립 구도 속에 놓이게 됩니다. 정통주의자들은 오랜 신앙고백과 교리 명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전통적 교리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교회가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합의해 온 불변의 진리”라고 여기며, 현대의 이성·과학과 충돌하더라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지요.

 

반면, 자유주의 쪽에서는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의 영향 속에서, 교리 명제를 둘러싼 초자연적 요소나 기적 이야기를 무작정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삼위일체나 성육신처럼 검증 불가능한 주장을, 어떻게 현대인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나?”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요. 특히 성경과 교리의 역사적·비평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런 교리 명제들은 특정 시대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언제든 재해석하거나 축소·수정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정통주의 vs. 자유주의” 프레임이 형성되면서, 똑같은 교리 문장을 두고도 전혀 다른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정통주의 진영은 교리를 “절대적·불변적”인 진술로 간주하고, 시대 변화에 맞춰 크게 바꾸거나 의심하는 태도를 경계했습니다. 반면 자유주의 진영은 교리가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 낸 신학적 산물’이니, 계몽주의 이후의 학문적·비평적 통찰을 받아들여 충분히 새 틀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교회 내부에서도 갈등은 심각했습니다. 정통주의에 따르면, 전통적 교리 명제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핵심을 수호하는 방파제이므로 흔들려서는 안 되지만, 자유주의는 “교회가 과연 현대 사회와 학문 세계의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이 두 입장이 각 교단의 신학교·목회 현장에 번져 나가면서, “전통 교리 명제를 지켜야 한다” vs. “시대에 맞게 수정할 수 있다”라는 식의 논쟁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갈등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신학—예컨대 바르트(Karl Barth), 불트만(Rudolf Bultmann), 몰트만(Jürgen Moltmann) 등—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었는데, 이들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양쪽을 비판적으로 수용·변형하면서 교리 명제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벌였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을 철저히 초월적으로 보면서도, 자유주의적 역사비평을 일정 부분 인정했고, 불트만은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라는 방법을 통해 교리 명제 뒤에 담긴 실존적 진실을 강조했습니다. 몰트만은 종말론이나 희망 신학 등을 통해, 전통 교리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설하려 했고요.

 

이처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정통주의 vs. 자유주의” 대립은 교리 명제라는 것을 고정 불변의 성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시대마다 달라지는 해석 대상이라고 볼 것인가라는 쟁점을 드러냈습니다. 한편에선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해석과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선 “그렇게 물렁하게 대처하다 보면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겠느냐”며 반대하기도 했지요.

 

명제를 둘러싼 평가는 시대와 사상의 흐름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준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현대 신학자들이 다시 한 번 교리와 신앙고백을 재점검하고, 교리가 가리키는 진리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할지를 고민하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정통주의 vs. 자유주의 구도 속에서, 교회가 교리 명제를 “절대적 진리”로 보거나 “역사적 산물”로 간주하는 데서 생기는 장점과 한계는 무엇일까요?

-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 학문(역사비평, 과학, 철학)으로부터 받은 충격 속에서 교회가 교리 명제를 지키기 위해 시도했던 전략들은 무엇이며, 그중 어떤 점을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 볼 수 있을까요?

- 명제에 관한 “재해석”이 교리에 활력을 준다는 주장과, “핵심 명제 왜곡” 위험을 강조하는 의견 사이에서,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공감하시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자유주의 신학이 “시대에 맞춰 교리를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구체적으로 교회의 어떤 태도가 달라지거나, 전통적 이해가 바뀌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 오늘날에도 신앙고백과 교리 명제에 대한 대립(정통 vs. 혁신) 현상이 보입니다. 이런 갈등을 건강하게 풀어 가려면, 교회와 신학은 어떤 원칙이나 대화를 지향해야 할까요?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